따뜻한 오후다. 향기로운 커피향이나.. 익숙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키보드의 정겨운 타자음 소리도 한가롭고 따스한 오후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토닥이며 창 밖을 내다봤다. 사무실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반짝이는 금빛 햇살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 정원이!!!!!!" 벼락같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어.... 퍽!!! 물론 이런 패턴만 아니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는 오후라 할 수 있을 거다. 빌어먹을. " 젠장! 책은 던지지 말랬잖아!!" 아아... 아무래도 책 모서리에 정통으로 맞았나 보다. 뒷통수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쪽팔리게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 되려 큰소리다? 어디, 사장한테 그렇게 대드는 알바생 있음 한번 데려와 봐! 그것도 반말짓거리나 일삼는 되먹지 못한 놈으로." 꽈배기 구워 먹은 말투로 유유히 안경을 치켜올리며 다가오는 저 싸가지를 봐라. 악덕 고용주의 현 실태란 말이다. 이것이 바로! " 사장이면 다야? 남녀노소!! 고용관계!! 불문하고 폭력은 이 시대의 죄악이야. 알아?" " 이봐, 알바생. 주제파악이란 걸 좀 해봐, 내가 아까 갖다주라던 서류도 잊어버리고, 넋 놓고 창 밖만 바라보는 알바생 따윈 해고되고도 남았어! " 아....맞다. " 이제 기억났나?" 아아..잊고 있었다. 그거 오늘 오후까지는 갖다줘야 인쇄소가 넘길텐데...또 까먹었다. 요즘 왜 이렇게 건망증이 느는지 모르겠다. " 지금 갖다주고 올게." 더 볼 것도 없이 내가 잘 못한 거니, 할 수 없이 의자 위에 자켓을 들고 일어섰다. 서류를 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역시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은 터가 안 좋은 것 같다. 경치 좋고, 야경 멋지고, 해질 녘 노을도 환상이긴 하지만, 없던 우울증도 도질 것 같은 이상한 답답함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서서히 옥죄는 느낌. 언젠간 가슴에 손을 올려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는 멍청한 짓도 했었다. " 원이야! 잠깐" 빠른 걸음소리와 함께 들리는 소리 때문에 뒤돌아 섰다. 아, 재수 없는 악덕 고용주씨다. " 택시 타고 갔다와." 그러면서 지갑에서 만원짜리 두개를 내민다. 솔직히 기본요금이면 될 거린데, 이건 좀 과하다 싶다. 하나만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 그랬더니 나머지 한 장도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 아닌가. " 갔다와." 그러면서 내 뒷통수를 어루만진다. 아까 맞은 자리인줄 아는지 꼼꼼히 눌러준다. 아하.... 아까 책 던진 거 미안해서 그러는 거냐.? " 치료비는 2만원 갖곤 안 되는데." 입술을 좀 삐죽거리며 노려보니, 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인상을 팍 쓴다. " 빨리 갔다 오기나 해! 택시 꼭 타고, 절대 걸어가지 마, 알았어? 빨리 넘겨야 돼" " 네네~ 사장님." 나는 충실한 알바생인양 성실히 대답해주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무실을 나서며 택시를 잡으려다, 불현듯 아껴야 잘산다 등의 희한한 모토가 생각나는 건 내 자의가 아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아싸 돈 모으자 식의 빈한 생각을 한 것도 결코 내 본성은 아니다. 결국 이만원을 바지 주머니에 고이 찔러 넣고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땀나게 뛰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산책하는 것처럼 느긋이 걸어가고 싶었지만, 택시 안 탄걸 사장놈한테 걸릴지 모른다. 돈 아낄려고 그랬다는 걸 들킨 후의 그...그....그....한심해하는 표정을 볼 생각하니 벌써 얼굴이 구겨진다. 해서 택시 타고 갔다왔다고 할 요량이라면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야 할거다. 돈 굳었다~~ 식의 이상한 노래를 중얼거리며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 20분을 전속력으로 뛴 것 같다. 지나는 길의 테디베어 상점이나, 31가지 아이스크림 집이나, 에펠탑 빵 집 등등의 눈길을 사로잡는 유혹을 뿌리치며 뛰어온 결과, 고지가 눈앞이었다. 제법 큰 4거리로, 내가 선 횡단보도에서 대각선 쪽으로 인쇄소 건물이 보인다. 좀 마음이 급해졌다. 횡단보도를 두개나 건너야하는 조급함 때문에 짜증이 나려고 한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니, 오오..다행이도 차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 파란불일때 잽싸게 대각선으로 가로지르자.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타이밍을 잡았다. 순간. 파란불이 탁! 켜지고, 나는 주위를 살피며 대각선으로 뛰기 시작했다. 헤헤.... 몇 발자국 안 남은 거리를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ㄷ 끼이이이이이익. 쿵. " 아..." 아아....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되긴 하지.. 젠장. 무단횡단이라 보상도 못 받겠다. 그렇게... 궁시렁 궁시렁 재수없는 일진에 대해 중얼거릴 쯤... 어느 순간 암흑이 덮쳐오는 바람에 나는 그만 암담해졌다. 나...죽는건가. 그 후로 난 어떻게 됐나 하면.... 그건 나도 기억이 안 난다. 가끔 까만 어둠을 헤치고 빛이 들어오기도 하고, 가끔은 그 빛 사이로 괴상한 생명체가 보일 때도 있었다. 그 괴상한 생명체 때문에 분명 난 죽은 거라고, 그래서 내세로 온 거라고 혼자 절망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이렇다 할 인생은 아니었지만 삶을 사랑하지 않은 자 그 어디 있겠는가. 빈대인생10년의 나 정원이도 내 인생은 소중했다 이거다. 그렇게 비몽사몽 오락가락하다 난 비로소 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아아...그 때의 감동이란... 난 살아난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사고 후에 나를 병원으로 옮겼나 보다. 당신 복 받을거야. 암... 그렇게...혼자 김칫국 마시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던 내가 처음 자각한 것은 맛있는 과일향과 상큼한 꽃향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가 문병을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갑자기 내 눈 사이로 뛰어든 그녀. " 어머~ 어머~ 깨셨군요? 루스탄님~ 루스탄님~~~~~~" 치렁치렁 헝겊쪼가리들을 번잡스럽게 걸치고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이상한 것들을 잔뜩 걸친 그녀가 서둘러 누굴 부르더니.....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눈부심을 자랑하듯, 금발을 온 몸에 휘감은 남자가 한 명 뛰어들어왔다. 다른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엄청나게 긴 금발. 오롯한 금색!! 그 기묘한 머리색에 정신이나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던 찰라. " 룬!" 그 금발머리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날 부둥켜안았다. " 룬...아아....마이데스라...감사합니다. 정말...감사합니다. " 부들부들 떨리는 팔은, 조심스럽지만 엄청난 악력으로 날 휘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무의식중에 살짝 비틀었더니, 더더욱 강하게 날 옥죄는 것이었다. 숨이 막혔지만, 계속해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남자의 발작적인 행동에 아연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인 체, 남자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자의 품에서 바라본, 주위 배경이 너무나..이상하고 낯설어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음....혹시...머리에 이상이....;;; 무슨 천막 비스무리한 걸로, 흔히 옛날 영화에 나오는 몽골의 막사나, 전쟁 중 세운 임시 막사 같은 곳이다. 위를 크게 돔처럼 치켜올려, 사람이 서있을 정도는 되고, 둥근 방안엔 침대를 기본으로 온갖 세간살이는 그런 데로 있는 듯 해 보였다. 따뜻하고, 촉감 좋은 털 이불이나, 향기로운 향이 베어나는 실내공기나, 언뜻 보이는 숫 사슴 뿔 같은 것이 위화감을 조성하지만, 그래도 꽤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물론, 현대의 기준에선 볼품 없지만 말이다. 마치 과거의 원시부족을 보는 듯 했다. 날 진찰한다고 들어온 사람은 파뿌리 늘어놓은 노인인데, 이상한 주문이나 외우다 나가버렸다. 또한 날 간호한다는 여자도 보면, 옷을 재봉한다는 개념이 없는 건지, 천을 되는 데로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또 왠 동물뼈는 저렇게 많이 걸었는지, 이상한 소리는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날 압사시킬 정도로 안고 있던 남자는 아마도 내가 중간 중간 눈을 떴을 때, 봤던 괴상한 생물체임에 틀림없었다. 그때는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아 생물체라고 표현했건만, 인간은 맞았다. 인간이 아닐 리가 있겠는가....... ..................음.... 혹시 모르니깐 그건 덮어두자. 굉장히 큰 키와 단단한 몸으로....마치....그래, 원시부족의 호승심 강한 전사 같다고 해두자. 객관적으로 봤을 때 꽤 멋지다고 생각한 얼굴은, 처음 봤을 때 자상했던 표정과는 달리 아주 딱딱히 굳어져있다. 아마도 그 원인은 나인 듯하다. " 리네... 다시 한번 말해봐." 남자는 날 간호한다는 여자를 앞에 두고 매우 화나있었다. ".....그...그게.... 소녀가 생각하기론... 저..기...룬님께서는 ....루스탄님을 기억 못하시는 듯 하옵니다. 화...황공하옵니다. " 여자는 매우 힘겹게 말을 마치고 남자의 발치 앞에 엎드렸다. " 죄...죄송합니다.. 저..저의 불찰인 듯 하니,...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부들부들 떨면서 엎드려 용서를 비는 여자를 두고,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휙 하고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뜨끔해서 잠시 나도 미안합니다 라고 할 뻔했지만, 이성을 찾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도 할말 많은 사람이다. 남자는 한동안 사납게 바라보다, 성큼 내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키가 상당히 커서 침대에 기대 있는 나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다. " 룬." 또다시 알 수 없는 이름을 부르는 남자. 난 한숨이 나왔다. " ......................" "...........나의...룬.." 목이 꺽일 정도로 올려다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발치에 무릎을 꿇고 나와 눈을 맞춘다. 이건 좀 고맙다. 가까이서 보니, 흠....뭐랄까. 내가 좋아하던 아폴론 신이 이렇게 생겼을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사람. " ....당신.. 잘생겼네... " 젠장...서둘러 입을 닫았다. 이 무슨 분위기 파악 안 되는 말이냐. " ......그건....칭찬인 건가..." 남자는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잔잔히 웃으며 내 머리를 넘겨주었다. " 그래....넌 내 얼굴을 좋아했지... 항상 봐도 보고 싶고, 안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었다. 기억나나?" 당근 안 난다. 댁은 처음 본 사람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암튼 난 사고를 당했었다. 아...맞다. 사고. 난 서둘러 내 몸을 살펴봤다. 팔 다리는 물론, 배나 머리도 살펴봤지만, 어디 하나 다친 데도 없이 멀쩡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왜지? 나 분명히 차에 받혔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아마 피곤이 겹친 모양이다. 갑자기 쓰러져서 나흘이나 정신이 없었어. 그..대로 영원히 잠드는 건 아닌가...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를 거다" 남자는 다시 내 손을 부둥켜 잡고 자신의 뺨에 가져갔다. 남자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해서, 정말로 가엽게 느껴졌다. 아마도 나를 누군가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사랑 받고 있는 상대가 있었다면 내가 잊을 리가 없지. " .....미안한데요. 저기.. 아무래도 날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전...룬이라는 사람이 아닌데요? 아...저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요. 서울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죠?" 내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남자가 움찔 내 말에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미동도 없이 내 손에 뺨을 부비고 있을 뿐이다. " ...정말 죄송하지만, 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저기...오늘까지 넘겨줄 서류도 있고, 사장놈도....젠장.. 잊고 있었다...으아.......또 엄청 깨지겠네.. 아!, 그러니깐 걱정할 사람도 있고, 저기 절 보호해주신 사례는 할 테니깐 ......음. 아! 전화기 좀 갖다 주실래요? 한 통화만 하면 데리러 올텐데..." "........................누가." 갑자기 남자가 고개를 번쩍 쳐들며 말했다. 미동도 않던 남자가 갑자기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그 기세에 눌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대체 누가 널 데리러 온다는 거냐." " ....네?" " 대체 누가...감히 누가 말이냐. 마이데스라의 축복을 받고 , 라쿤 부족을 이끄는 나, 라일 루스탄( 부족의 수장)의 반려를 누가 데리고 간단 말이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이상한 말을 하는 남자 때문에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내 말이 기분 나빴나? 그런 내 표정에 더욱 화가 난 건지 내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 잘 들어! 룬 루스틴(부족 수장의 반려) !! 우리가 했던 그 날의 맹세처럼 우린 영원히 함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네가....네가! 나를 잊었다고 해도.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너와 함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알았나? 룬? 하. 기억을 잃어? 감히 네가 날 지웠단 말인가? 용서하지 않아! 그런 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룬!!!" 남자가 흔드는 바람에 골이 울렸다. 미친 듯이 외치는 남자의 말소리도 어지럽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봐도 정신병자다. 나 꽤 위험한 상황인 건가. 머리가 아파왔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이상한 말만 줄줄이 쏟아놓고 나가버린 남자 뒤로 아까의 그 여자가 들어왔다. 굽신굽신하는 모양새를 보니 가정부라도 되는 건가. 아무튼 용건을 꺼냈다. " 전화기 좀 갖다 주세요. " 날 돌봐준 은인 같아 예의 상 인사라도 해야겠지만, 여긴 아무래도 정신병자 소굴 같다. 어서 어서 돌아가야만 한다.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졌다. 아니 무서워 졌다. " .......루....룬님....흑흑....정신을 좀...챙기셔요.." 느닷없는 여자의 울음소리에 다시 한번 골이 울렸다. " 내가 지금 정신 챙기게 생겼어요? 여기 도대체 어디예요!! 저 사람은 누구고! 아니,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전화 좀 쓰게 해주세요? 네? 정말 급해요. 도와주세요!" 울컥 화나는 마음을 애써 달래고 애원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연쇄살인범 소굴에 잡힌 희생양인 듯, 엄청난 거부감과 두려움이 급속도로 밀려오는 바람에 손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정원이. 침착해. ".....루..룬님.. 정말 기억나지 않으세요? 여..여긴 하이데카 왕국의 북부 지방인 메릴랜드고...그리고 메릴랜드의 소수부족인 라쿤영지잖아요. 아! 룬님이 자랐던 레베탈 부족은 생각나시나요? 라쿤에 부속되기 전에 레베탈 부족의 사제셨잖아요. 네? 기..기억 안 나세요?" 아아.... 갈수록 태산이로고. 너무나 엉뚱한 그녀의 말에, 방금 까지 무서웠던 기분은 어디 가고, 한심스럽고 권태로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싶을 정도로 쌍으로 잘들 논다. 메릴 어쩌구 레베어쩌구 내가 알게 뭐냐. " ........기억 날 리가 없잖아요." "............ 아아......가엾으신 분....흑..흑.." 다시 울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안되겠다 싶었다. 이 여자도 날 도와줄 위인은 아닌 것 같으니 직접 밖으로 나가서 길을 찾아봐야겠다. 몸을 주섬주섬 일으키니 여자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 일어나시면 아니 되세요. " ".....답답해서 밖에 좀 나가 보려구요." " 아...안되세요. 지금 밖에 춥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거동하기엔 좀 이른 듯 하오니, 쉬셔야 해요." 여자의 만류를 무시하고 다리를 땅에 디디고 응차 하고 일어섰다. 순간...핑... 하고, 약간 현기증이 돌았지만, 뭐 그런 데로 몸 상태는 괜찮은 듯 했다. 꽤 오래 누워있었던 듯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로 몇 번 펴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절부절 못 하던 여자도 서둘러 다가와 헝겊을 덧댄 신발(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난감하게 난잡한.)을 신겨주고, 커다란 흰색의 모피이불을 어깨에 감싸주었다. 발 같이 늘어뜨린 헝겊의 천을 걷고 나가 보니, 생각보다 큰 막사가 하나 더 있었다. 마치 내가 머물고 있는 막사를 품고 있는 듯 그 위로 더 크고 넓은 막사가 이중으로 세워져 있던 것이다. 저쪽 편으로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순간 술렁거리는 게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발처럼 내려져 있는 헝겊을 들어올려 나가보니, 확~ 달려드는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따가운 햇살에 잠시 눈을 찡그리다가, 눈을 뜬 주위는...청량한 겨울 공기가 가득 찬 설경이었다. 언덕 위에 위치한 듯 안쪽으로 휘어진 강물은 살얼음이 얼었는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저 멀리 산의 그림자는 아주 멀어서 그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막사들이 촌을 이룬 건지 꽤 먼 곳까지 다양한 모양의 막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느 산자락에서 단체로 야영이라도 하는 건가. 주위 풍경으로 봐선 완전 깡촌 같았다. 그 흔한 전깃줄과 차 한 대 없는 걸로 봐선. 아아...무슨 이상한 종교 집단에 끌려온 건가. 나? 서울에서 여기까지...아무리 봐도 산 속 깊은 곳인 이곳까지..무슨 목적인 거야. 당신들. 그렇게 한탄하며 무심코 하늘을 봤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곤 다시 리네를 돌아봤다. 이상한 옷차림. 뭔가 불길했다. 다시 하늘을 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돼버리고, 이미 벌어진 턱은 빠질 정도고, 가슴은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여...여기 어디냐..생각해봐. 이런 데가 있었냐.? 도대체 어디길래, 달이랑 해가 나란히 떠있냐고!! 어? 이거 이상한 거 아니냐!!!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아주 울창한 숲이 있을 거라는 건 막연히 예상했었다. 왜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열악한 막사 같은 곳에서 원시적으로 살고 있을 까닭이 없잖은가.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 임시변통으로 일종의 텐트 같은 걸 치고 사는 거라 혼자 미련스럽게 단정짓고 있었다. 천천히...손을 들어 목 뒤편에 갖다 댔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 .....룬님...이 곳에 지식을 다 잃으신 거 같아요.. 샤룬을 보고 그렇게 놀라시다니..." "....샤룬이라뇨?" 내가 꽤 오래 굳어져서 멍하니 서 하늘을 보고 있었더니, 같이 나온 여자가 딱하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 네..샤룬이요.. 원래 있던 두 개의 해 중에 하나의 해가 달에 의해 가려지는 현상을 말해요." ".......그럼...달처럼 보이는 거무스름한 부분에 해가 하나 더 있단 말인가요.? " " 네~샤룬은 축복 받은 시기에요. 해가 둘 일 땐, 지독한 가뭄과 열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샤룬기에 대부분의 양식을 준비하고, 햇빛을 차단할 막사를 정비하고 그런 다음, 샤트윈기에 ...아, 해가 둘인 시기요. 이 샤트윈기엔 집에서 꼼짝도 안 한답니다. " 아...네...그렇습니까.. 멍하니 중얼거렸다. " .........룬님?? "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당황해서 손수건(넝마에 가까운 헝겊)을 꺼내들고 안절부절한다. 슬프다거나....절망한다거나...그런 기분은 딱히 들지 않았지만.. 눈물샘이 미친 건지......마냥 퐁퐁 솟아나는 눈물은 나도 주체할 수 없었다. "....루...룬님...몸이..어디 편찮으신가요? 네? 드..들어가세요.. 울지 마시구요..룬님?" "......아...아무래도...." " ..네?" "...........아무래도..나.... 죽은 모양이군요." " 네에~!?" 눈알이 굴러 떨어질 듯 눈을 크게 뜬 여자가 우스워...조금 웃었던 거 같다. 난...죽은 모양이다. 여긴..서울도...부산도....한국도..미국도...심지어 지구도...우주도. 그 어느 곳도 아니었다. 난.... 내 생각대로 내세로 왔나보다. 정말 죽은 건가보다..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꿈을 꿨다. 자고 있는데도 내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장놈이라고 갈구고 다녀도 나의 형인 사람.. 그 사람과 다투던 꿈을 꿨다. 피도 안 섞인 동생. 거기다 백수에 뭐 하나 볼 것 없는 동생.. 뭐가 이쁘다고 챙겨주는 지....등신같은 내 형인..그 사람.. 다신...못 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깐...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가슴을 움켜잡았다. 숨이 가빠지고...너무나 답답한 기분에 미칠 것 같아 몸부림 쳤다. 소란스런 소리와.... 내 몸을 부둥켜 안은 팔과... 끊임없이 닦아주는 뺨의 손길... 다정한 토닥임... 그런 것들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가위라도 눌린 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의형... 내 죄악을 안고 가는.. 당신.. 더는 못 보겠지. 이현형... ... 당신 울고 있을까. 날 위해... 울어주고 있나. 회상(1) 난 고아였다. 흔히 있는 고아원의 꼬질꼬질 땟물 흐르는 작은 아이. 그게 나였다. 몸집이 작아 형들에게 자주 괴롭힘 당하고, 찌질이라고 불릴 만큼 항상 잘 울었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다. 울기만 하면 때리는 통에 아파서 울고, 그러다 지치면 혼자 또 울고, 그런 게 일상인 아이였다. 그렇지만...그게 그렇게 힘들다..서럽다 생각도 못할 어린 나이였다. 그런 내가 풍채 좋고 인자한 남자의 손에 이끌려 대궐 같은 집으로 오게 된 건 10살쯤이었다. 갓난쟁이 때 버려져 언 10년을 산 고아원을 뒤로 한 체 마음 따뜻하고, 인자한 양부모에게로 입양된 것이었다. 정말 행복했다. 행복이란 게 뭔지도 몰랐지만, 크고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는 것도 기뻤고, 생전처음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서 행복했다. 거기다 나보다 5살 많은 형도 하나 있었으니, 매일매일이 행복에 겨워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이 들떠있었다. 엄마는 몸이 안 좋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아이 하나를 입양할 생각이었는데, 사실은 0~2세 가량의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빠가 어느 날 나를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엄만 처음에 아빠의 독단적인 행동에 화를 냈지만, 내가 오던 날, 날 안아주면서 '이것도 인연인가 보구나..'하면서 나를 받아들였다. 처음의 서먹함도 잠시, 부모님은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소중히 대해주셨고, 한달 이 지나기도 전에 난 이 가족의 일원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엄마는 말했다시피 몸이 안 좋아 자주 병원을 찾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날도 많았지만 언제나 날 옆에 두고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과자를 만들어주거나, 밤이 되면 같이 잠들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보다 더 극성이었다. 놀이 방에 쌓일 정도로 맨 날 사들이는 장난감에, 온갖 희귀한 먹거리에, 일이 없는 주말에는 날 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항상 필요하다면 뭐든지 주고, 말하지 않아도 매일 선물꾸러미를 양손 가득 들고 들어오는 아빠를 보면서 정말 내 아빠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정말 내 엄마와 아빠가.... 옛날에 날 버리고 갔다던 내 부모님이 다시 돌아와 나를 데려온 거라 혼자 생각했었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바쁘고, 실상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형이었다. 형은 중학생으로 학교가 끝나면 거의 매일같이 일찍 집에 와 나와 놀아주곤 했다. 처음엔 부모님까지도 형이 혹시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기우였던 듯, 형과 나는 아주 사이가 좋았다. 형은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명문학교를 다니면서, 온갖 상이란 상은 다 휩쓸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벌써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아빠의 뒤를 이을 만큼 큰 경영자가 될 예정이라 했다. 내가 좀 커서 형이 있는 학교(중학교 고등학교가 같이 있음)에 들어갔을 땐, 난리도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인기 많은 형 때문에 나는 그 배경으로 친구도 많았고, 그러면서 학교생활이 즐거워지고, 점차 보통사람처럼 ....보통 내 또래의 아이들처럼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형과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형은 불현듯 군대를 갔고, 내가 고2가 되던 해 전역한 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토록 살갑게 굴던 행동과, 다정한 말들과, 굿나잇 키스는 다 옛말이었고, 나를 본체 만 체 하는 형 때문에 그 당시 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다. 군대에 있을 때도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나 전화 한 통 없는 형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내가 뭘 잘 못했는지...형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형의 난잡하고 복잡한 여자 관계 또한 부모님께 주의를 들을 정도로 심해지고, 갑자기 레이싱을 한다고 잘 다니고 있던 대학을 자퇴해선 종적을 감췄었다. 부모님의 걱정은 날로 커지는 와중에 수능시험이 다가왔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경영학과를 지원했다. 딱히 가고 싶은 과도 없었고, 경영학과를 가라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흥하고 싶기도 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 날 그가 찾아왔다. 재수하는 애들 위로해주고, 대학간 애들 축하해주면서 한잔 한잔 꽤 많이 마셨던 나는 첫눈에 형을 알아보지 못했다. 술에 취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형의 얼굴이 거의 피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놀라 형과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도 잊은 체 달려가 부둥켜 안고 상처를 살폈다. 형은 그때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않고 있었다. 집 근처라 집으로 가자니깐, 갑자기 뒤돌아 걷기 시작한 형을 따라 모텔이라는 데를 가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거나, 가끔 집에 들어왔다 금방 나가는 형을 보긴 했어도, 그렇게 가까이 오랫동안 마주한 건...거의 몇 년 만인 것 같았다. 모텔로 들어서기 전 중간에 사 가지고 간 붕대나 소독약을 주섬주섬 풀고, 멀뚱히 서 있는 형을 앉혀 치료해주었다. 어디서 다친 거냐고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대답도 없이 바닥만 쳐다보고 앉았던 형...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그 날은 나에게 있어 여러 가지 의미를 준 날이었다. 그 날은 형이 나에게 다시 돌아온 날이었고, 그 날은 형이 처음으로 내게 고백한 날이었으며, 또 그 날은.....내가...형에게 안긴 첫 날이었다. 우린 형제사이를 넘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사이가 됐지만, 나도 그도 행복했다. 그의 눈물 섞인 고백과 그간의 방황을 들으면서 다신. 이 사람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으로 남자의 몸을 받는 고통을 뒤로하면서 평생. 이 사람의 몸을 품어주고 보듬어주고 같이 사랑하기로 혼자 결심했었다. 피가 안 섞였다 해도 호적으론 형제로 묶인 사이라는 것도,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아는 날엔 내가 행복해마지 않던 완벽한 나의 가족도 끝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 있으면... 나의 형.. 내가 사랑하는 그만 있으면 세상이 내 것일 것 같은, 그런 지독한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내가 21살 그가 26살로, 난 대학교 2학년에 그는 아빠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 갑자기 환각처럼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ㅊ.....몸이 ...그.........하옵..니......그....언....ㅈ.....네...아..정신이 드십니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면서 형광등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무섭지 않을텐데.... ".....룬님?.... 아아...이런...룬님? 대답을 해보세요.." 눈을 멍하니 뜨고 대답을 안 하자,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니, 아까 봤던 파뿌리 영감이다. 하..하.. 왠지 웃음이 나왔다. "...........아...아무래도...흠흠...뭔가 충격을 받으신 것 같나이다." 피식거리는 웃음 사이로 노인의 당황한 말투가 공허하게 울렸다. 밤이 됐는지 막사 안은 좀 어두웠고, 장작 타는 냄새가 매케하게 나는 것만 빼면 따뜻한 잠자리였다. 정신차리고, 물어 볼 건 물어보고, 나 같은 사람이 혹 더 있는지 알아봐야 할 거 같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만...됐다... 나가보게." 낮은 저음이 작게 울려 누군가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그 금발의 남자였다. 이...름이 뭐라더라.. 노인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고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남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낮에 번거롭게 많이 걸친 옷차림과는 달리, 흰색 옷만 간단히 입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피곤한 걸까.. 또 내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은 체, 나와 눈 높이를 같이 한다. 전처럼 부둥켜 안아올까 순간 긴장한 몸은 남자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금방 기운이 풀렸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그의 눈빛을 받는 게 참...이상하게도 민망해져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네고 말았다. " 나...좀 일으켜주세요." 내 말에, 남잔 흠칫 몸을 떨었다. 이어, 조심스레 다가온 팔이 내 양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가 살짝 들어올렸다. 남자는 서둘러 베개를 내 등에 받쳐주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손을 어루만지듯 잡았다. 어색해서 빼내려 하다, 이 정도 스킨쉽은 견디지 못할 것도 아니기에, 그냥 나뒀다. 이런 일로 옥신각신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도 고단한 날이었던 터라.. " 실례지..만...이름이.?"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아까 뭐라 들은 거 같은데 기억 날 리가 없다. 내 물음에 남자는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들어 내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래....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도....나쁘지 않을 테지. 옛날처럼.....다시 처음부터..." 슬퍼 보이는 남자의 얼굴과 마치 혼자 다짐하듯 속삭이는 말에 가슴이 떨렸다. 두근......왜 이러지.. " 라일 루스탄. 아까 말했듯이 라쿤 부족의 수장이다. 너와 어떤 관계인진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은데..." "......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어요." 반려라고 했다. 이 사람과. " 보통사람들한테는 루스탄이라는 칭호로 불리지만, 너는 라일이라고 불렀다. 기억나나?" " 그것에..대해....한가지 말해둘게 있는데, 난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에요." "........룬." " 아까처럼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해주면 좋겠어요. 나한테도 설명할 시간을 줘야죠. 나도...너무 혼란스런 상황이라 정확히..뭐라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 얘길 좀 들어주세요." 라일은 대답 없이 내 손만 쓰다듬고 있었다. 어두운 막사 사이로 타오르는 장작불 때문에 라일의 금빛 머리카락은 이제 붉은 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얼굴은 살펴보지만 음영이 져서 표정 읽기가 어려웠다. "..........아까..화를 낸 건 사과하지 않을 거다. 그건 엄연히 네 잘못이지. 내 곁을 떠난다는 건 곧 영혼의 맹세를 파기한다는 것. 그 말은... 나보고 죽으라는 말과 같다. 룬. 예전의 너라면 잘 알았을 테지만.... " "......................." "....그래.......얘길..하고 싶단 말이지... 솔직히 두렵다. 네게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이런 적이 한번도 없어서..난 정말 겁을 먹고 있지.. " 라일은 그 말을 끝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었다. 한동안 숨죽여 웃다가, 고개를 든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봐." ".............................." ".................얘기해봐. 룬.. 네 말이라면 언제나 들어줬어. 잘 들을 테니깐, 화도 안내고...... 그러니깐 네가 혼란스럽다는 상황이 뭔지 말해봐. 거기서...나도 원인을 좀 찾아야겠다...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나도 좀 알아야겠어 .. 룬아...." 분명 이 남자는 절망하고 있었다. 편안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과 그 떨림에서 그의 슬픔과 절망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없다. 왜 내가 그의 반려이고, 나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지... 정말 궁금할 뿐이다. " 구구절절히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소용없는 짓이라는 거.. 아까 리네라고 했던가요? 그 분한테서 샤룬기에 대해서 배웠을 때...그 때 이미 여긴 내가 아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 "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 아는데... 내 머리가 미치지 않은 이상.. 난 당신도..리네도..여기 풍경도 다 낯설어요.. 당신 말대로...내가 기억을 잃은 거라면....나한테 남아있는 기억들은 뭔지..말이 안되잖아요. 난 다른 이름을 갖고 있고. 이런 막사 같은 곳이 아니라..맨션에서 살았고...우리형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거 뿐이라구요. "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신은 나를 룬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난 정원이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에요.. 이건 부정할 수 없어요. 그저 기억을 잃어 당신을 몰라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 내가 이곳 사람이라면 다른 기억이 있을 리 없다. 자동차나 전화가 잇는 곳, 무엇보다도 해가 하나 뿐인 그 곳.. 그리고 나의 형이 있는 곳. 그런 곳이 내 머릿속에 있을 이유가 없다. "................................................" "..........믿을 수 없어요? 나도 ...그래요. 나도 내가 여기 있는 게 믿기지 않아요" 이렇게 매정하게 말하는 내 자신이 싫지만,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괜한 오해받기 싫었다. "........미안해요. 룬이라는 사람이 아닌데..그 인척 할 수 없어요." ".............................................." "......아마도...난... 그곳에서 사고로 죽었거나....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난 돌아가고 싶어요. 물론...갈 수 있다면 말이죠..."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난 정말 돌아가고 싶었다. 아직 형한테 못다 한 얘기도 많다. 내 못다 한 꿈을 이루거나, 내 죄악을 씻을 수 잇는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말로 그랬다. 죽 내 손을 잡고 있던 라일의 손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축축한 기운과 뜨거운 그의 체온으로 내 손도 역시 뜨겁게 끓고 있었다. 내 말을 조용히 듣던 그가 물었다. " .....룬이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까만 머리칼과, 네 맑은 눈동자나..붉은 입술...뺨...목...너의 몸까지 다 알고 있는 내가 ...널 잘못 봤다고?....... 룬으로 착각했다고?"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마치 울고 있는 거 같았다. "..........무려 10년을 봐왔어. 15살의 나이로 레베탈의 무거운 사제복을 걸치고..나의 라쿤으로 온 그 날부터 무려 10년이었다. 처참하고 비열한 후계자 경쟁 속에서 미쳐가고...양어머니의 모진 고문으로 피폐한 날 ....날 살리던 네가... 항상 나에게 빛을 주던 너를......나의 룬을.....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하고 착각할 수 있겠어. 응? 룬... 생각해봐....룬아..." 점점 흐느끼듯 힘겹게 이어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다시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다...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신의 오묘한 합리라는 것에 걸려든 건지도 모른다 라고... 무슨 목적에선지...난 이곳으로 왔고, 그는 그의 사랑을 잃었다. 신의 합리. 인간이 모르는 신의 변덕스러움..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요~ 룬님께서 말에서 떨어지실 때! 그 때 루스탄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 안 나세요? 전 똑똑히 기억한답니다. 세상에~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어요! 자신의 몸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온몸을 던져 룬님을 감싸안으시고, 땅에 떨어지셨는데...뼈도 부러지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피도 나는 와중인데도 그저~룬님이 행여 상처라도 낫나 다급하게 살피시던 그 모습이...어쩜~~ 그때 저희들은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찌나 멋지시던지...정말 황홀했다니깐요!!" 평화로운 오후의 여유...여기에 커피 한잔..사무실 밖의 반짝이는 강물.. 예전처럼 이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한 숲길을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나...청량한 숲 내음과 함께 산책하고 싶을 뿐이었다. 처음 얌전하고 공손하게 봤던 이 여인은 사실 조잘대기가 참새 저리가라다. 이걸 너무 늦게 안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하루 종일 떠드는 그 목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면 말 다했지. 안 그래 리네? 속으로 생각하며 원망의 눈빛을 쏘아 보였다. " 에? 룬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아....충실한 하인이라... 좋긴 하다만..눈치가 너무 없다. 그러니깐 지금까지 그녀의 얘기를 종합해보자면... " 라쿤이 세력이 커지자 복종의 의미로 힘이 없던 레베탈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사제 한 명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룬 히델. 그 해 15살. 라쿤의 18명의 아들 중 가장 출중한 라일의 정신수련 담당으로 라쿤 족에 함류. 라일의 나이 그 해 18살. 사제지간으로 시작해서 우애깊은 친구사이로, 그러다 절대적인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무엇보다 후계자 전쟁에서 라일을 승리로 이끈 정신적인 지주가 룬이었고, 에....또..." " 라일님께서~ 수장이 되신 뒤 반려의 의식을 갖고 루스틴(루스탄의 반려)의 칭호를 받게 되신거구요~ 그로부터 한...3년이 흘러 바로 오늘이 됐다 이 말씀이죠~" "...............아아...그래요...." "...어머.~ 룬님~ '아아..그래요'가 아니에요~ 그리고 며칠후면 정말 중요한 의식이 있는데..그....합." " 무슨 의식이요?" 갑자기 입을 다무는 리네가 이상해서 되물었다. ".........어머...내 정신 좀 봐... 아...저기 룬님... 죄송하지만 전 이만 점심 준비를 하러 가 봐야돼요. 그럼 이따 뵐께요~"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리네를 바라보며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의식이라니.. 잠시 생각하다...아무렴 어떤가 식의 자포자기로 생각을 끊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라일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지만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도저히 과학이나 상식으로 생각할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그 날 진지하게 얘길 나눈 후 라일은 몇 일을 보이지 않다가 어젯밤엔 잠시 내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갔다. 잠든 척 했지만 그의 집요한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불에 데일 듯 열렬한 시선을 감은 눈 사이로 느끼면서... 왠지 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토록 사랑받다니.....룬이란 사람이..정말 부러웠다. " 그나저나...의식이라니?" 다시 떠오르는 의문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의식이라... " 수장께서 영혼의 반려를 만난 날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밝고 맑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붉은 머리에 아주 경쾌하게 생긴 소년이 바위에 앉아 있었다. 내가 뒤돌아보자 소년은 바위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소년이 아니라...청년인가...체격이나 얼굴은 청년에 가깝지만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소년 같아 동안으로 보인 모양이다. ".......아...저런... 정말 기억 못하시는군요.. 루스탄님의 책무를 돕고 있는 사칼이라 합니다 다시 한번...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 되나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슴에 손을 댔다가 내린 사칼이라는 남자는 다시 한번 해맑게 웃어 보인다. 사칼.....이곳에서 만난 3번째 사람이었다. 오늘 나온 이 고기스프는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기름기 둥둥 뜬 느끼한 국물하며 걸죽한 비계덩어리는 식욕을 감퇴시키기엔 제격이었다. 거기다 엄청나게 쓰다 못해 혀가 얼얼할 정도인 풀잎을 띄웠는데, 향신료 같은 거라고 위로해봐도 절대 먹을 수 없었다. 토기까지 올라왔다.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나무수저를 내려놓았다. " 더 먹으셔야 해요. 룬님." 리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더 권하지만 도무지 입맛이 동하질 않는다. 원래 신경이 예민해서 환경이 바뀌거나 식사풍습이 조금만 바뀌어도 식욕이 떨어졌다. 내가 고집을 피우고 먹질 않자, 리네가 재빨리 과일을 썰어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 그럼.. 과일이라도 많이 드세요. 안 그러시.." " 과일은 소용없다. 리네." 먹기 좋게 썰린 빨간 알갱이가 탐스러운 열매를 먹어보려 했더니, 갑자기 들이닥친 목소리 때문에 멈칫했다. " 아. 루스탄님. 마이데스라.(신께서 축복을)" 리네는 재빨리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 과일은 체력회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카멜에 티브라잎을 띄운 것이 좋다하여 특별히 준비한 거다. 억지로라도 먹이는 게 좋을 거다." ".......소녀도 알고 있사오나...저..룬님께서 입에 안 맞는다 하시어.." 그제서야 라일은 나를 굽어본다. 단 몇 일 못 본거지만, 꽤 오랜만인 듯 그의 시선이 낯설었다. 그 시선을 참지 못하고 피해버렸다. 볼 때마다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 리네..잠시 나가 있거라." " 예...루스탄님." 리네가 재빨리 사라진 뒤, 내 맞은편에 자리잡은 라일은 내가 먹다 남긴 음식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카멜인지 뭔지를 들고, 나무수저로 자신이 살짝 맛을 보듯 먹어 본다. " 확실히 네 입맛은 아닐테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곤, 다시 나무수저로 한 숟갈 뜨곤 내 앞으로 내밀었다. " 그래도 먹어야돼. 몸과 마음 모두 허해졌을 때, 좋다고 하더군. 몸 생각하고 먹어봐" 그제서야 난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봤다. 빛나는 금발을 허리까지 길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퍼져 있었고, 파란눈에 맞춘 파란색의 옷은 추운 겨울을 대변하듯 냉기가 흘렀다. 아름다운 얼굴이야 몇 번 봐도 감탄할 게 뻔하고, 큰 키에...큰 손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현형이 떠올랐다. 어? 순간 좀 놀라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됐다. 순식간에 투영된 거라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갑자기 형과 그가 겹쳐 보였었다. " ..왜 그러지?" 그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아...아뇨." 잘못 봤나 하며 멍하게 잇는 사이 역한 고기냄새가 느껴지는 수저가 입에 들어와 있었다. 정말 토할 거 같았다. " 안돼. 그냥 먹어" 뱉어버릴 요량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가 내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곤 말했다. " ......힘들다는 거 알지만, 정말 먹어야돼." 무자비하게 입을 틀어막은 손 덕분에 억지로라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윽.. 뱃속에 들어가서도 요동을 쳐댄다. " 하아.. 정말 싫어요." 그런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또다시 수저를 들어올린다. " 싫다구요." " ...그래도 먹어" " 싫어요!!" "....룬아!" 계속해서 들이대는 그 역겨운 냄새 때문에 난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결국엔 그를 가까스러 밀쳐내고 바닥에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욱욱..무슨 임산부 입덧하듯..민망한 소리가 가득해 난 정말 창피해졌다. 어느새 그가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지만, 괜히 원망만 나왔다. " 하아...하아.. 내가 싫다고 했잖아요.! 윽.." 내 원망에도 그는 묵묵히 등을 쓸어주다가 날 그대로 안아 올렸다. 공주님 포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속으로만 뜨악하고, 특별히 거절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힘도 없는데 다 토하는 바람에 몸에 기운이 빠져버렸는데 어쩌란 말인가. 날 침대 위에 눕힐 줄 알았는데, 그는 날 안고 그대로 막사를 나섰다. 창피하다거나..뭐 그런 감정은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이 우릴 애인사이라고 아는 사람들일텐데 새삼 내숭떨 필요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라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헛. 루스탄님. 마이스데라!" 어느 막사 앞에 이르자, 보초로 보이는 사람이 놀란 듯 서둘러 경례를 올린다. 라일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들어가려는데 그 보초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 아, 루스탄님. 막사 안에 지금 사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칼이?" " 예! 한시간 정도 됐습니다." 라일은 잠시 멈춰 나를 내려보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추슬러 안고선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 ....루스탄님, 급히 할말이....아....." 사칼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말을 하려다 그의 품에 있는 나를 보곤, 놀란 듯 말을 멈췄다. 라일은 사칼을 한번 스쳐보며, 꽤 큰 침대에 나를 내려놓고 검은 털이 부드러운 모피이불을 덮어주었다. "....괜찮아. 내 방이다. 좀 쉬도록 해." 한번도 내 막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내가 불안해 할거라고 생각했는지, 행선지를 밝힌다. 수장의 방이라 그런지 굉장히 크고 화려했다. 수렵의 흔적을 뽐내는 듯한 사슴뿔은 당근 있었고, 동물의 뼈 같은 것이 다른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것뿐 아니라 여기선 흔히 볼 수 없는 보석들도 엄청 많았다. 사파이어 같은 푸른 보석을 줄로 꿰어 창문에 커튼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 ...내 방이 많이 신기한가?" 정신 없이 둘러보는 나를 보던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사파이어 커튼은 정말 컬쳐쇼크네요" "..뭐?" 그가 알 수 없다는 눈짓을 해 보인다. "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곤 그냥 누워버렸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사칼이라는 자가 계속해서 할말이 있는 듯 조급해 보였기 때문이다. " 얘기 나누세요. 전 좀 잘게요" 내 말에 라일은 그제야 사칼을 뒤돌아본다. "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쿠란드 부족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라..." 라일은 그 한마디만 듣고 다시 내 머리맡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이불을 꼼꼼히 점검해주고는 자신의 머리칼을 한데 모아 끈으로 묶으며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음.....묶은 머리로 그의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턱 선이 예술이다.) " 그 부족은 항상 말썽이지.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 예! 분명.. 심어놓은 정찰병들 말로는 요 몇 달간 부쩍 군사를 늘렸다 합니다. 그것도 공개 군사협정을 위반한 체, 비밀스럽게 진행됐다고, 아무래도 전쟁을 준비하는 듯 하다고 급히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시급한 상황보고를 누워서 엿듣고 있는 나는 많이 민망했다. 도무지 수장이라는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아까 낮에 본 그 해맑은 웃음의 소유자인 사칼이라는 자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완전 양면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굉장히 큰 일인 것 같은데 이 사람은 계속 내 머릿결만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아아...이래서 미인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 하지 않았는가...... ........................너 세게 돌았구나. " 루스탄. 간부 몇 명을 보내 사전 경고를 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먼저 선전포고해야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참에 그 불순한 무리들을 아예 멸족시키는 것도 좋지 않을 까요? 살인과 악행을 일삼는 그런 것들은 메릴랜드 전 부족에 해충 같은 존재입니다. 속히 명령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루스탄님!" "..................장로들은 소집했나." ".......아뇨. 아직" " 그럼, 협상단을 보내서 경고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지어." " 하지만 루스탄님!...." " 장로회 노인네들한텐 입 단속 잘해. 쓸데없이 걱정만 많은 것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이래라 저래라 수다떠는 건 사양이다. 그래, 사칼. 네가 단장으로 갔다오는 게 좋겠군. 너만큼 능변인 놈도 없지. 적당히 비위 좀 맞춰주다 확실히 입장을 밝혀라. 때에 따라선 위협도 좋겠지.. 그놈들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된 거다." "....하..하지만!.." " 그만." ".................그럼...루스탄님. 잠시 나가셔서 마저 얘길 들으시죠." 사칼은 안되겠는지, 라일보고 나가자고 한다. 역시 내가 방해가 된 모양이다. 그런데 라일은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이번엔 내 손을 잡아다 입을 맞추고, 뺨에도 대보고 하면서 다시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이사람아....네 부하 애가 타는 모양인데.....곤란한 표정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 잠은 안 오나 보군. 속이 많이 가라앉았으면, 간단히 뭘 먹는 게 좋을 거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 부르려는 그를 보면서 아무래도 내가 자야 그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급히 만류했다. " 아...아뇨! 저기...저 잘건 데 그만 저 분과 나가보세요." ".........왜.?" 왜라니... " 아니...저기...전 잘 모르지만...뭔가 급한 일이신 거 같은데 전 신경 쓰지 마시고..나가서 일 보시라구요." 그가 미간을 살풋 찡그린다. " 기억 못하겠지만... 급한 일 따위로 널 뒤로 한 적 없어. 한번도." 기억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거라니깐.. " 사칼이 급한 일인데도, 날 찾아오지 않고 여기서 기다린 건 항상 그래왔기 때문이다. 너와 함께 있을 땐,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해." "..........하지만.." ".......그리고 ..예전엔 안 그랬지만... 지금은...네가 잘 땐 내가 옆에 있어야된다.." ".....왜요" "........너. 그렇게 쓰러지고....정신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면서 울었다. 알고 있나.?" 아... 그럼..자면서 가끔 느끼는 온기나.. 속삭임이나..따뜻함이 바로 그였나 보다. 첫날 여기가 더 이상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고 절망해 버린 그 날. 현이형 꿈을 꾸면서 그렇게 울었는데...그 눈물을 받아준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나 보다. 그러면서...내가 자면서 또 울게 될까봐...그 눈물을 또 받아주려고 이 사람은 내가 자는 동안 그렇게 내 옆을 지키고 있을 생각이었나 보다. 가슴이 울렸다. 또 깊은 곳에선 따끔하고 통증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그가 잡고 있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 ...그만 나가봐, 사칼."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 말에 사칼은 더 굳은 얼굴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순간 차가운 냉기가 가슴에 박히듯 날 향한 눈동자는 얼어있었다. 왠지...밝게 웃던 그의 모습보다 이 모습이 진짜인 것 같았다. 그는 비웃듯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근처 탁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차를 따르며 말하기 시작했다. " ...........이러니깐....라일. 내가 맘에 안 든다고 했잖아... " 헛... 갑자기 그가 반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제까지의 공손한 말투가 아니었다. " ......현명한 수장의 제일 기본이 첫째도 백성. 둘째도 백성. 셋째도 당연히 백성이어야 하거늘, 절대적 숭배에 가까운 연인이 있어서야, 어디 부족이 구렁텅이로 빠져가도 모르는 거 아니겠어? 지 혼자만 희희낙락, 아주 신이 낫지." 엄청 위험해 보이는 그의 발언에 라일은 잠시 뒤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살짝 흘깃 흘려보곤, 차갑게 말했다. " 웃기는 군. 반려를 맞이하라고 부추긴 건 너였어." " 반려를 맞이하랬지, 사랑을 하라는 건 아니였어!! 라일!" 탁!! 짐짓 여유로운 체 들고있던 찻잔을 세게 내리치며 그가 거세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 그래. 난 룬이 항상 맘에 안 들었어.!! 조그맣고, 약하고, 부족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거기다 레베탈의 볼모로 팔려온 버림받은 인생이지. 안 그래? 언제나 룬 때문에..뭘 하든 룬이 먼저고, 넌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는 너의 백성도 버릴테냐? 저 하찮은 놈 때문에?" " .....그만" " 뭐가 그만이라는 거야.! 내가 분명 경고했지? 아무리 네가 수장이라도!!! 날 뒤로하고, 우리 부족을 뒤로하면 룬이든 뭐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내가 말했지!!! 라일!!?" 룬은 정말 미움받고 있었나 보다. 사칼의 신랄한 말에도 라일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계속 나를 향해 있었다. 주먹은 꽉 쥐어 쥔 체로, 격한 분노가 일 듯 입가가 굳어 있었지만, 마치...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오히려 내가 더 걱정된다는 듯이...따뜻하고 염려 어린 눈빛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 거기다 기억도 잃었다며? 널 기억도 못한다며!! 그럼 룬의 거죽만 남은 시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정신차려야 할 건 너야. 라일! 넌 라쿤의 수장이다!" 그 말을 끝으로 미동도 않던 라일이 번개같이 일어나 칼을 뽑아 들었다. 스릉..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곧 사칼의 목덜미를 아슬하게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 ..............그래서." "..........................." " .....그래서 뭐....... 내가 수장이라서, 그게 뭐가 어떻단 거지?" 지독하게 낮고 거친 목소리가 고요하게 방을 울렸다. " 라쿤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내게 뭘 줬나. 말해봐, 사칼. 어렸을 때부터 날 봐온 네가 볼 때. 내가 수장이 돼서 뭘 얻었나. 피로 얼룩진 검이냐. 산을 이룬 시체더미냐. 아니면 아부나 일삼는 쓰레기들이냐. 말해봐. 난 이런 것 밖에 기억에 없다." " .....................수장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자리는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장이 되신 이상 책임질 것이 많다는 걸...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주제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 ...주제넘은 정도가 아니라 날 모욕했다. 룬을 모욕한 건 곧 나를 부정하는 것. 넌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댔어. 네가 아무리 내 책사를 넘어 나와 친구관계라 할 지라도 그런 모욕은 용납 못해." " ....벌을.....내려주시옵소서..." " ...........태형 10대로 넘기겠다. 알아서 벌하고 속히 상처를 치료해 쿠란드 부족을 만날 차비를 해라." "...예." " 나가봐" 사칼이 그렇게 나가고도 그는 여전히 뒤돌아 선체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의 말대로 주제넘은 짓은 안 하기로 했다. 난 룬이 아니다. 그러니, 그의 반려는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어째서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체념하고 있는 건지 한심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정말 나를 부인한 체 룬이라는 사람으로 그의 곁에 있는 수밖에 없게 된다. 왠지 ....그건 끔찍했다. 이 남자가 나를 룬이라 부르고 나를 룬이라 생각하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어느새 다가온 손의 온기가,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아까처럼 마주잡은 손과 그의 눈빛이 다시 내 감정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대론..안돼. " 난 룬이 아니에요." 참을 수 없어 내뱉었다. 룬이 아니라, 정원이. 나는 정원이라구요. "......................상관없어"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 ..........이젠...아무것도 알 수 없게 돼버렸어. 내가 누군지...네가 누군지...우리가 누군지..여기가 어딘지...그런 것 따윈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단지,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것.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만.."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울렸다. 상관없다니...말도 안 된다 싶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그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온다. 무슨 의민지 눈치챘기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숨소리와 숨결이 오른쪽 뺨가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 룬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고개를 돌린 그대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는 그에게 화가 났다. 내 말에 그가 손을 들어 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양손으로 내 뺨을 가득 쥐며 말했다. " 상관없다고 했어" "....난 상관 있어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키스할 만큼 속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도.....너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뭐? 순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 네가 누구든 룬의 모습을 하고 이곳에 있는 이상, 그리고 내가 이곳의 수장으로 있는 이상 결정은 내가 하는 거고 넌 받아들이면 되는 거다. 권력의 형태는 약자에겐 비참해도 나 같은 사람한텐..꽤... 편리한 수단이거든? 난 언제든 널 굴복시킬 수 있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내 연인을...내...반려를 내가 안겠다는 데 누가 뭐라 할 것 같은가?" 내 양 뺨을 다정하게 쥐고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그의 말을..난 이해할 수 없었다. " 받아들이라니...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죠. 난 당신을 모르고 지금 있는 곳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면 용감해지는 법이지. 알아? 내가 널 어떻게 할지.....상상해봐, 이 입술을 물어뜯고, 네 몸을 구석구석 핥고 깨물고...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울 거다...네 작은 동굴도 당연히 잊지 않았지..날 품고 흘리는 신음이라던가...쾌락에 젖어 힘껏 조이는 그곳을 내가 잊을 리가 있겠나....매일 밤 생각하고 미칠 것 같이 욕망하지.... 몰랐나? 아님 알고 있었어? 아아...그래...넌 알 리가 없지" 그의 긴 넋두리에 혼을 빼놓고 듣고 있던 중, 갑자기 그의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잡고 침대로 내리눌렀다. 앗. 하는 사이 그가 내 몸 위에 자리를 잡았고, 순간 울리는 머릿속 경보음에 힘겹게 발버둥을 쳤다. 내 팔은 당연하듯 그의 손에 가뿐히 잡혀 머리위로 올려졌고, 두 다리는 이미 그의 단단한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아...하아...가뿐숨을 내쉬는 건 나뿐이었다. 가슴이 심하게 들썩였다. 내 얼굴 위론 바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는 숨을 내쉬는 나를 고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최대한 힘껏 노려봤다. 당신 따위한테 꺽이지 않겠어.!! 이상한 오기와 승부욕이 정신을 메워왔다. 그는 여전히 고요한 시선이었다. 날 옭아맨 팔과 다리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한없이 조용하고 고요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눈빛만 바라볼 뿐 가만히 있던 그가 한숨처럼 물었다. 심하게 뛰던 심장이 그의 말 한마디에 더욱더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원이......." 그래. 그렇게 불러 줘. 룬이라는 이름 맘에 안 들어. " .....그래...원이야.......원이...."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 오길래, 이번에야말로 하겠구나 싶었지만, 그냥 피하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그가 의외라서 그랬을까. 하지만 그는 내 입술 근처까지 다가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방향을 틀어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냥 그렇게...곧은 코로 잠시 부비기도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도 하면서, 깃털 같은 입맞춤도 하는 것이었다. 왠지...그가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날개를 쉬는 작은 새처럼, 한없는 고단함에 지쳐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의 팔에서 점점 힘이 빠지다가, 이윽고 내 손목을 쥐고 있던 팔을 풀고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천천히 입술을 턱과 ...뺨과...코...이마로 옮겨 조심스런 입맞춤을 하던 그가 마침내 내 입술에 닿았을 땐, 난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그러면서 한순간 스친 기이한 데자부... 입술을 열고 들어온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느끼며, 마치 익숙한 듯 그의 혀를 마주 감는 나의 혀를 느끼며....난 ...왠지 두려워졌다.. 혹시..내가 정말 룬이라는 사람인가 싶어서...나 정원이와 ...나의 형 정이현과...내가 살던 곳이 정말 진짜가 아닌가 싶어서...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젠 정말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돼버렸다. 평소와 달리 따뜻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마치...언젠가 느껴보았던 가슴 충만한 안정감.. 그게 언제였더라....잠이 깰락..말락 하는 중간에 기억을 더듬어 봤다. 아, 그래.. 내 생애 처음으로 형의 품안에서 잠든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형과 몸을 섞고 바로 가버리는 때완 달리, 그 날은 형이 붙잡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매정해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날 만큼은 형이 이끄는 데로 그의 품에서 잠을 자고 싶었다. 너 같은 건 그럴 권리가 없다고, 넌 그에게 있어 죄악의 산물이라고 품에 안긴 순간까지 신랄하게 자학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의 따뜻한 품이 너무나 행복해 그대로 단잠을 자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먼저 가버린 형의 자취를 들여다보며, 간밤에 보았던 그의 눈물을 생각했다. 소리도 없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손을 뻗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면서...한없는 서러움에 나도 같이 울었었다. 그의 아픈 어깨를 안아 줄 수 없어 더욱 슬픈 하루였다. 그래서 기계적인 잠자리를 뒤로하고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평소처럼 자고 가라고 이끄는 손을 못이기는 척 마주잡고 그냥 그렇게 소리 없는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난 ... 그가 왜 눈물을 보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원인은 나였고, 나로 인해 생긴 일들이었고, 내 죄악의 근원이었다. 잠결에 생각한 과거였지만, 갑자기 너무나 생생하게 머릿속에 잡히자 문득 괴로워졌다. 서둘러 생각의 고리를 끊고, 아까부터 간질대는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졸린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나의 신 아폴론, 그의 모습이 보였다. " 잘 잤어?" 한껏 눈꼬리를 휘며 웃는 그의 모습이 정말 태양 같다고 생각했다. 금발의 머리가 벗은 어깨를 넘어 부드럽게 펼쳐진 모습도 멋졌고, 그의 품안에서 눈을 뜬 아침도 너무 따뜻했다. 아마도 잠이 깨기 전 형을 생각하던 여운이 남은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 ...잠이 덜 깬 모양이네...눈이 반쯤 감겼어." 내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그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있었다. 그는 모로 누워서 한쪽 팔로 머리를 기댄 자세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망하게도 난, 그런 그의 가슴에 착 달라붙어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내 가슴 위에 놓인 손으로 이불을 끌어 목까지 덮어주고, 토닥인다. " 더 자. 아직 새벽이야." "...........당신은요." "......난 원래 잠이 없어. 항상 너보다 빨리 깼지." 그의 손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 항상 일찍 일어나 네 얼굴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이 제일 좋았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나한테는..." "............................................." 한숨이 나왔다. 그의 눈이 다시, 아득한 옛날의 그의 연인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고백 들어봤자, 난 룬이 아니라고 이 사람아....그렇게 혼자 생각하며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날것 같아 자는 척 하기로 했다. 괜히 미안했다. 아니...괜히 질투났다. 아니아니...그런 것보다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변덕스러운 마음이다. "..............어제....강압적으로 말했던 건...잊어버려.. 어느 누구도.....나 조차도 널 함부로 할 수 없으니깐... 그냥 홧김에 한 소리다. 알지?" 그가 내 앞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권력이 어쩌니, 무조건 받아들이라니 뭐 그런 말들을 사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땐 좀 당황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진 않았다. " 너..와 난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네가 말하는 것들,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여기 있어 줘. 여기가 네가 살 곳이라고 생각해 줘. 바로 내 옆에서 평생 함께 하겠다고....내 반려의 자리가 부담스러우면 친구도 좋고, 가족도 좋고, 뭐든 좋아. 그냥 내 옆에 있겠다고만 해주면 다른 건 필요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멀뚱히 듣고만 있던 날 끌어당겨 안는다. 양 두 팔로 꽉 껴안는 그 품에 조금 숨이 막혔지만, 기분 좋은 압박감이라고 생각했다. " ...............어차피 갈곳도 없어요.. 돌아가고 싶다고...말하긴 했지만 방법도 모르고" 날 끌어안은 체로 그는,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그거 다행이군...하면서 잔잔히 웃었다. 나도 그의 품에 더 파고들면서, 이 말은 하지 말기로 했다. 방법도 모르고 있을 리도 없겠지만 포기한 건 아니라고, 당신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떤 기회든 오면 잡겠다고, 반드시 돌아가고 싶다고.....그런 길을 찾을 거라고... 그런 말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옆에만 있어달라는 그의 애원을 들어주는 척...그의 웃음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얘길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한낮이었다. 그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리네가 탁자 옆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반긴다. " 일어나셨어요? 아침을 올릴까요?" 어째 리네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 .......................리네 .....얼굴이 왜 그래요." ".....네? 뭐가요?" "....입이 귀에 걸렸잖아요." 잠이 덜 깨 반쯤 눈을 감고, 그렇게 말했더니, 리네가 아아..룬님도 참~ 하면서 콧소리를 낸다.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 룬님께서 그렇게 기억을 잃어 소녀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금방 합방을 하시니, 소녀가 어떻게 안 기쁘겠어요~~?" 하고 다시 입이 귀에 걸린다. 난 또 뭐라고... " 기억을 잃으셨어도 루스탄님을 좋아하시는 거죠? 그렇죠? 아아..소녀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루스탄님도 한시름 놓으시겠네요." 세숫물을 준비하고, 다른 사람이 가져온 식사를 탁자 위에 올리면서도 쉴새없이 조잘댄다. " 그런 거 아니에요. 리네." 라고 내가 중간중간 정정해줘도.. 당사자가 들을 생각도 안 하니, 별 수 없는 일. 실컷 좋아라 떠들도록 그냥 뒀다. " 그런데...라일은 어디 갔어요?" 아까부터 궁금했지만, 그녀의 속사포 같은 말들은 틈을 내주지 않아, 겨우 지금 물어보게 됐다. 그를 찾는 내 질문이 대견스러운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 루스탄님께선, 오전 중엔 정무를 보신 답니다. 아침에 저에게 당분간은 여기서 모시라고 그러신던걸요~ 정무가 끝나시면 바로 오셔서 점심은 같이 하신다고 그러셨어요~" 이 막사는 잠만 자는 곳인가 보다. 수장의 막사라고 해서 여기서 일도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그래도 수장의 막사이니, 어제 사칼의 보고 사항처럼 급박한 일은 여기서 얘기가 될텐데..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어제도 사칼이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화내고 갔지 않은가. 화낸 정도가 아니지..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는 건 라일도 알텐데 자신의 막사에서 지내라는 건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난 신경 쓰인다. ".....원래 있던 막사로 돌아가요."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말했다. 리네의 눈이 순식간에 커진다. " 네에~? 왜~요~~" ".....내가 여기 있으면 라일이 일을 못해요. 그에게 볼일이 있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불편해 할 거에요." "......하..하지만 루스탄님께서.." " 나중에 기별을 넣어줘요. 어차피 내 막사에 있을 테니 그가 오면 되죠. 그편이 나아요" 차를 다 마시고 나서 일어섰다. 리네가 서둘러 모피이불을 어깨에 덮어주었다. 솔직히 이런 시중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막사를 나왔다. 수많은 막사들 사이로 리네의 안내를 받으며 걷던 나는, 새삼 이방인의 정서가 이해가 됐다. 나만 동떨어져 있는 듯 한 느낌을 걷는 내내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철이 있는 건지, 뭔가 두드려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도 보이고, 가축을 돌보는 사람과,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보인다. 막사를 점검하는 사람들, 불가에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나무를 옮기는 사람들, 가구 따위를 만드는 사람들....각기 자신의 할 일을 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듯 했다. 나와 마주치면 가벼운 눈인사를 하는 모양을 보니, 루스틴의 지위는 그다지 높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리네만 보더라도 라일에겐 거의 엎드리다시피 인사를 하니까 말이다. 끝없이 배열된 막사들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 .......왜 ...집을 짓지 않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나무나...돌을 이용해서 집을 지을 수 있을텐데요. 막사는 불편하잖아요." " 에이~ 룬님~ 저희는 이동민족이잖아요~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서 집 같은 건 안 짓는답니다" 유목민 같은 건가.. " 샤륜기와 샤트윈기가 번갈아 오기 때문에 기후변화가 심하고, 주위의 환경이 수시로 바뀌어요. 이를테면..강이 말라 버리던가, 아니면 홍수가 나지요. 또 나무가 말라죽거나, 위험한 동물떼가 이주해오기도 해요. 그러면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하죠~ 여기서도 음....샤륜기와 샤트윈기가 각각 세 번은 지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떠나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아직 이상한 변화는 없지만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눈부신 태양과, 그 옆의 거뭇한 둥근 그림자, 샤룬기의 하늘은 정말 기이했다. 마치 선과 악, 그들의 양면을 보여주는 듯해서 신기한 마음에 한참을 올려다봤다. 가만... 해가 두 개 떠있는 모습도 멋질 것 같은데....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 막사로 돌아와선, 다시 침대위로 올라가 몸을 기댔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침대 위에서빈둥거리는 일밖에 없다. 따뜻한 모피이불로 몸을 감싸고 앉아 다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이 부족을 떠나볼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길도 모르고 이 곳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이 무작정 떠날 순 없다. 뭔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도 라일이 보고만 있진 않을 거다. 그럼....같이 가보자고 해볼까.. 흠....이번 건 좀 괜찮을 듯 싶다. 그냥...여행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나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는 이 부족의 수장이니 쉽게 자리를 비울 순 없을 텐데..그게 문제다. 물론 그가 허락한다는 확신도 없지만. 어쨋거나 이 곳에만 머물러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아무것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고, 아무도 뭘 해라 일러주지도 않고, 난 그냥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가끔 멍하니 생각하는 게 다다.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으로 오게 됐으니, 다시 돌아갈 방법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들뿐이다. 하지만 내가 신의 그....조그마한 실수로 기억을 간직한 체 내세로 오게 된 거라면... 정말 죽은 거라면... 정말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인 거다. 이도 저도 아닌 체, 그저 멍하니 생각에 생각만 거듭하다 화병 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 왜 여기 있어. 내 방에 있으라니깐." 책망하는 듯한 말에 고개를 들자, 어느덧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싸쥐고 있었다. " ..........여기가 더 편해요." 내 말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뺨을 감싸쥐곤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 뺨이 차갑다, 밖에 오래 있었나?" "......음.....이것저것...신기한 게 많아서요." "..그래?" 그는 사려 깊은 눈으로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아마도...내가 넋 놓고 생각에 잠긴 걸 계속 보고 있었나 보다. 우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맘에 걸리겠지..... 괜한 걱정을 끼칠 까봐, 살짝 웃으며 말했다. " 배고파요.." 내 말에 그도 웃으며 리네를 불렀다. 그래....서로 연인처럼,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같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남자의 넘치는 사랑을 조금만...아주..잠시만 받아들이고 싶어서.....내 스스로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협하고 있었다. 그냥..그렇게 잠시 꿈처럼 있고 싶었다. 회상(2) 그때. 갑자기 환각처럼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의 아빠와 다정한 모습으로 교활한 웃음을 띄고 '원이야'하며 거짓 눈물을 흘려 보였다. 짐짓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것처럼 눈물바람인 그 여자를 두고, 아빤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네 친엄마란다'...라고. 그녀가 말하는 그간 사정이라는 건 참 웃기고 황당했다. 내 친엄마라는 사람은 아빠의 불륜 상대였다. 아빠는 한결같이 사랑했다지만 그 여잔 그런 아빨 두고 떠났단다. 그 와중에 날 낳았고 경제적 여력이 없던 그녀는 날 고아원에 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여건이 마련됐다 싶어 날 찾아보니, 옛날 자신의 남자가 날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어릴 때 헤어진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 친권을 주장하려고 소송까지 준비했다는 데, 아빠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마침내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나 뭐라나. 피식 웃음이 샐 정도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원하는 건 돈이었다. 애초에 아빠를 버린 것도, 날 버린 것도 모두가 돈이 문제였다. 그 당시 아빠는 평범한 셀러리맨에 불과했고, 그런 그를 단순히 놀이상대로 취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굉장한 부자에다, 마침 자신이 버린 아이까지 키워주고 있으니, 날 목적으로 그와 만나면서 거짓 애정을 키워간 것이다. 그게 언제 적부터인지 내가 알 바 아니었지만, 아빠는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날 데려다 키운 동기도 그녀 때문이었단다. 그녀의 아기가 어느 고아원에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바로 입양을 서둘렀다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날 친자식처럼 아껴주었던 것도, 그 여자를 사랑하는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떠난 여자의 아이를, 더구나 그 여자와 다른 남자 사이에 난 아이를, 사랑한다고 키울 수 있냔 말이다. 미친 것 같았다. 둘 다. 그녀는 그의 돈에 목을 메고, 그는 그녀에게 목메는 동안 이혼준비도 일사천리도 진행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결혼준비를 하면서 새하얀 신부처럼 들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내 아름답고 완벽한 스윗홈은 내 친엄마라는 사람 때문에 깨지게 된 것이었다. 그 다음부턴 완전히 지옥이었다. 그 날 내 친엄마라는 사람을 만난 뒤로, 이제 내 친엄마라는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말을 들은 뒤로, 난 그 길로 형에게로 달려갔었다. 따뜻한 위로를 바라고 간 게 아니었다. 그런 건 바랄 수도 없는 위치가 된 거라고, 이미 납득했었다. 형에게 달려가 그 날 내가 듣고 본 상황을 기계적으로 말하면서 이혼은 막아달라고 애원했었다. 충격에 빠진 형을 두고, 뒤돌아 서면서 우리의 관계도 변할 거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 바람에 결국 울고 말았다. 지금까지 생각해봐도, 그 날만큼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이 갑자기 이혼 당하고, 그 집에서 나가게 된 나의 양엄마가 입원을 하던 당시, 성대한 결혼식 대신 신혼여행을 갔다 온 내 친엄마가 그 집에 안주인으로 들어앉았다. 그렇게 해서 친엄마와, 양아빠, 그리고 나의 형과 다시 10여년 전처럼 새로운 가족이 탄생되게 되었다. 난 그녀의 웃음이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그 어떤 것보다 싫어서 미칠 것 같이 숨이 막혔다. 양아빠와 가식적인 부모노릇을 할 때면 무엇이든 깨부수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내 방벽에 주먹질을 해댔다. 그녀에게서 난 조금의 핏줄의 이끌림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나를 인생의 크나큰 로또복권처럼 생각하는 그녀에게 난 한번도 내 친모라고, 그래도 내 엄마라고 타일러 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입원 중인 양엄마에게 매일같이 다녔었다. 양엄마는 날 볼 때마다 화병이며, 음료수 캔이며 과일 등을 미친 듯이 집어던졌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게 얌전하고 고상하고 자상했던 나의 유일한 어머니였던 그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런 나를 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감싸줬다. 물론 아빠와는 연을 끊다시피 했지만, 너무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나를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다. 그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듣고도, 나의 친엄마라는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온 다음에도, 자신의 엄마가 입원까지 했음에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자책하지 말라고,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본 마냥 그렇게 날 위로하고 걱정하고 여전히 사랑을 속삭였었다. 그때만 해도... 그래, 아주 최악은 아니라고, 좀더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깟 집 나오면 그만이라고, 형과 함께 다짐하면서 그의 따뜻한 손을 붙잡고 또 붙잡으며 놓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나의 양엄마는 스스로 목을 멨다. 그로부터 불과 몇 개월 후 내 친엄마와 양아빠는 교통사고로 같은 날 사망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닌 죄인의 목숨이 돼 버렸다. 그래서..무작정 서울을 떠났다. 첩첩산중의 절도 다녀보고, 남해 쪽을 돌며 궂은 일도 하면서 무조건 서울에서 먼 곳으로, 형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곳으로, 그럼에도 같은 하늘, 같은 땅에 있다는 것도 너무 미안해서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녀가...내 생모가 나에게 유일하게 준 것이라곤, 평생을 사죄해도 씻을 없는 죄악과 사랑에 대한 끔찍한 거부감. 그것뿐이었다. 한 3년 정도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리고 정확히 26살 겨울즈음.. 주문진 어디쯤에서 오징어 배에 잡일꾼으로 일하던 때였는데, 밤새 배를 타고, 한낮에 김씨 아저씨와 사는 자취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가 있었다. 예전보다 각이 진 얼굴을 하고서,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허름한 자취방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난 낡아빠진 오리털 파카차림에 삼일이나 안감은 머리를 하고, 온 몸에 오징어 비린내를 잔뜩 묻힌 체 방문을 연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아마도 경악으로 물든 내 얼굴이 마주쳤다 싶은 순간, 난 번개같이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가 놀란 듯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지만, 마치 그가 오래된 빚을 받으러 온 것 마냥, 내 어머니의 죄를 물어 날 해치려 할 것 마냥 미친 듯이 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그러다 어느 후미지고 더러운 골목 안에서 잡혀버렸다. 잡히자마자 거세게 끌어안긴 형의 품은 여전히 따뜻했고,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도 여전히 다정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는 끊임없이 미안하다 했다. 정작 미안한 건 난데, 내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저 미안하다...미안하다 속삭이고 있었다. 혼자 둬서 미안해..모른 척 해서 미안해..빨리 찾지 않아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미안해 원이야....... 간단히 점심을 먹고 별 말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다 나간 그의 자리는 바람이 휑하니 불만큼 허전해 보였다. 그가 있을 땐, 알게 모르게 긴장되고 약간의 불편함도 느끼던 내가 이제는 그의 빈자리에 한숨지을 만큼 그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더 기가막힌 건, 가끔 그가...못 견디게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도 그건 화려한 모습에 편승한 일종의 호감일 테지만, 날 쓰다듬는 눈빛이라던가, 조용히 염려하는 말투는 못 견디게 그를 그립게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 죽을 것 같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나의 형...그 사람에게 일말의 죄책감으로 용서를 빌곤 한다. 날 보내고 힘들어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다시는 그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만 하면.. 하루에도 열 두번씩 피가 거꾸로 솟는데, 사춘기 소녀 같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이나 품고 있다니, 나도 내 낯짝이 이렇게 두꺼운지 몰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멀뚱이 앉아서 자책과 회한에 몸서리치고 있을 무렵. 뜻밖의 손님이 방문했다. "......너......룬이 아니라고?" 화창한 오후의 반가운 인사를 바라진 않았지만, 뜬금없는 내용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 생각이 났다. 아....이 사람은 날 싫어했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룬을 싫어했다. " 라일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말 한 적이 있었다. 룬이 아니라고,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그랬다지?" 사칼은 꽤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 ....당신이...무슨 상관이지?" 일단 나에게 적의를 품고있는 그에게 공손한 말 따윈 안 하기로 했다. 그가 거칠게 나오는 데로 나도 기대에 부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 당신?" " 그래, 당신.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 지 모르겠네." 거기까지 말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무래도 잔뜩 방기된 몸뚱이로 위협적으로 말해봤자, 효과제로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느긋한 몸짓으로 탁자 옆 의자에 앉아 따라놓은 물로 목을 축였다. " .....확실히 ... 단순한 기억상실증은 아니야. 그렇지? 네 행동이나 말투, 전혀 다른 사람이 됐어. 하하... 라일, 그의 절망스런 표정이 이해가 되는군. 전혀 그의 사랑스런 룬이 아니니깐..? 안 그래?" 뭐가 그렇게 웃긴지...내 맞은 편에 서서 탁자 위에 손을 얹은 체, 탁자 위 찻잔이 덜그럭 소리를 내는데도 발작적인 웃음을 그치질 안았다. " 그래.....확실히 이제야 알겠어... 그럼 넌 ....누구지?" 글쎄....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다만..? 그의 눈을 차분히 바라봤다. 뭔가 퍼즐처럼 이어지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 .......다른 세계에서 온 어이없는 영혼이라 해두지. 일단은. 그러는 당신은 내가 룬이 아닌 게 그렇게 흥미로운 일인가?" " ........................아아......" 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말꼬리를 흐리며 의자위로 털썩 주저앉는다. " 정신이 나갔다는 결론이군." " 이봐, 난 미치지 않았어." 발끈해서 쏘아 부쳤다. 하긴, 미친사람이 자기 미쳤다 그러는 거 본 사람이 있을까. 그의 황당한 결론에 난 떨떠름하게 변명했다. 아니지! 변명이 아니라 사실 아닌가. " 라일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네 앞에서 웃고, 말하고, 멀쩡한 척 그랬겠지만 난 다 알아. 그는 룬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의 말이 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하나 얹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도 알아. 알고 있다고... " 룬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계속 이상한 말만 해대니 견딜 수가 없었겠지. 더군다나 정력가에 호색한인 놈이 네 놈 손가락 하나 못 건드리고 있으니 욕구불만으로 곧 사단이 날 거다. 하. 나야 두 손들고 환영이지. 너 같은 놈. 그한테는 수치고 짐일 뿐이다. 알고 있나?"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찻잎을 후후 불어 쓴 물을 입에 머금었다. " 그래서 말인데....한가지 제안을 하지." 시종일관 비꼬는 말로 남의 속을 뒤집어 놓던 놈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머리를 열었다. " 네가 룬이 아니라고, 그...네 말대로 다른 사람이라면 여길 떠나라." ".........." " 내가 모든 걸 다 마련해주지. 하인도 부쳐주고 돈도 주고, 뭐든 다 해줄테니 여길 떠나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군. 그러는 것이 그에게도 네게도 좋을 거다." "....................당신에게도 말이지.?" 내 말에 그의 눈썹이 호선을 그리며 치켜올려졌다. " 당신 말야.... 그가 룬 때문에 부족의 안위를 살피지 않는다 하면서 불평해대지만...실상은....견딜 수 없는 거지? 그가 룬을 사랑하는 거 말야...." " ........뭐??" " 그래서 내가 기억도 잃고 정신도 이상하다 싶으니깐, 옳다구나 하고 내쫓을 작정이고? 흐음.... 글쎄.....옳은 방법일까? 라일한테 미움받을 걸?" 그렇겐 못해주지... 당신 말야. 뭔가 로맨스적인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도와줄 의사는 없다고. 정정당당하게 마음도 밝히지 못하는 주제에 고작 한다는 짓이 연적 제거냐..? 하. 보기와는 다르게 소심하군... 물론 이 뒤에 말은 목구멍으로 간신히 삼켰다. 사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분노의 오라가 무성히도 퍼져 있건만, 놈은 더욱 더 차가운 눈초리로 자신의 분노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놈들이 직접 화내는 놈들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 함부로 주둥이 놀렸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어... 기억도 없다는 놈한테 그와 나의 관계를 모욕당하고 싶지 않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내가 미치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거든" 참 달콤하게도 살벌한 내용을 내뱉는 놈은 굉장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쳇.. 속으론 불나고 있으면서 폼은. 물론..이 말도 목구멍에 걸려 그냥 삼켜졌다. " 생각해 볼 것도 없겠지만 하루의 말미를 주지. 곧 떠나게 될 거다." " 그건 내 의사와는 상관없다는 뜻인가?" 그가 문으로 향하다가 고개만 살짝 돌려 산뜻하게 대답했다. " 물론 남겠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더 이상 나도 참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떠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란 얘기군. 협박도 참, 멋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떠난다라.... 아까까지만 해도 이 곳을 벗어나 볼까 생각했었지만 막상 기회가 오니,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그를 두고 가야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를 두고 아무것도 모르는 곳을 정처 없이 유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두려워졌다. 그를 이렇게 까지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었나 싶다. 여길 떠나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면.....아아...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부셔질 만큼 아파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난 의외로 그를 많이....그것도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이놈의 지조없는 심장아... 너 왜 그러니.. 그렇게 온갖 상념이 난무하는 오후를 보내고 정신적인 피곤함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계속 갈팡질팡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결국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자장가를 요상하게 불러 제낀 뒤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잠이 깬 건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굉장히 무겁고 답답해서였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내 몸을 누르고 있는 것에 손을 대고 밀어보아도 꿈쩍을 않는다. 이윽고 가슴도 단단히 내리누르는 그것 때문에 숨쉬기도 곤란해지자, 지독한 수마를 몰아내고 힘겹게 눈을 떴다. 처음 자각한 건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내 가슴이며 침대 위에 흩어져 있었고, 목덜미가 간질간질했다. 옆으로 눈을 내려보니 아마도 그 머리카락의 주인인 듯한 머리통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혀로 핥고 있는 듯 했다. 잠결에 할짝 할짝 하는 소리를 듣긴 했어도 설마 이게 원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잔뜩 늘어진 무게를 내 몸 위에 겹치고 다리도 있는 데로 엉킨 체, 손은 수시로 내 배며 엉덩이를 미친 듯이 쓰다듬는 이 사람은 분명 술에 취해 있었다. 코를 마비시킬 정도라, 술독에 빠졌다고 해도 믿길 만큼 지독했다. 냄새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어지러움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절박한 심정이 그의 몸짓으로, 숨소리로, 혹은 술 냄새로 느껴졌다. 사칼 그가 말한 데로 라일은 이미 한계점인 듯 했다. " 라일."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들렸는지 그가 이미 침범벅이 된 내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등불이 아스라이 비추는 방안은 좀 어두워서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 .......술 마셨어요?" 한참을 가만히 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하지만 딱히 할말이 없었다. " ........................마시지 않고는...배길...수..가 ..없었.....지..." 길게 말을 늘이는 그의 부정확한 발음이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그래도 내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하니, 좀 기특한 마음에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그의 근육이 꿈틀하더니 이내 입술박치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내 입술을 열어왔다. 아.....딱히...키스를 유도한 건 아닌데.... 피식 새나가는 웃음에 나도 어이가 없었다. 거칠게 들어온 혀는 아무래도 독한 술로 마비된 건지 둔한 움직임이지만, 부드럽게 내 혀를 감싸안았다. 마주 쓸어주면서....한가하게...생각했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술에 취한데다, 잔뜩 쌓인데다, 거기다 그동안 받은 상처까지 겹쳐져 그가 날 범할지도 모른다고 무심히 머릿속에서 경고를 보내온다. 내 가슴에서 정처없이 부유하던 그의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더니 뒤쪽으로 돌아 엉덩이를 꽉 움켜잡는다. 그 바람에 신음이 흘렀고, 그는 진심으로 흥분했다. 더욱더 밀착해 들어오는 그의 몸이 성적 긴장으로 단단히 굳어있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굳이....말리거나...저항하거나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될 데로 되라 싶은 심정은 새삼 정조의 위기에도 나 몰라라 방기상태에 놓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의 외모나 육체나...또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상태를 봐선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내 것에 맞물려 몸을 비비며 키스를 해오려 했을 때,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의 근육이나 체격으로 봐선, 절대 밀리지 않을 굳건함이었지만, 그는 회초리라도 맞은 듯 경련하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이쯤에서...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지만 뭐라 말하겠는가. 같이 자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고? " ........룬은......항상 몸을 떨....었지.. 그저...내가 원하면....몸을 내주면서도...바들바들 심약하게도 떨어대서, 그게...또...사...랑..스러워서....참을...수 없었어.. 미친..듯이....한계까지 안고..또 안고.....그러면 룬은....아침에 일어...나지도...못했어... 난.....그 핑계로....그를...보살피고....그리고..또..몸을..섞고....그가 신음...하고...아아....정말이지..." 내 눈을 불같이 휘어잡고서 횡설수설 속삭이는 말을 듣고 있자니, 흥분은 커녕 애처로웠다. 하지만 그런 내 측은한 마음과는 달리 여전히 허리 아래로 맞닿은 그의 남성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고, 내 양어깨 사이로 뻗어 체중을 지탱하는 팔은 근육이 꿈틀댈 정도였다. 당신도...나도...참...불쌍하다. 문득 휩싸인 연민에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감싸고 그의 아래로 손을 뻗었다. " 아........" 몸서리치며 기뻐하는 그의 살덩이가 내 손에 단단히 잡혔다. 어깨를 한 차례 출렁이며 눈을 크게 치켜 뜬 그가 신음을 흘렸다. 내 손이 움직임을 더할수록, 그는 점점 밑으로 깔아지는 몸을 주체못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가 기뻐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 손길에 몸을 떨며 기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아아....룬.......룬!!...." 가슴에 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 부드럽게 허리를 휜다. 날 타고 앉은 엉덩이가 잦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끝으로 내 손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 찐득한 액체를 바라보며, 그의 흥분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사정과 동시에 다시 내 몸 위로 쓰러지듯 덮쳐온 그 때문에 또 숨쉬기가 곤란했다. 그러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정말 못할 짓이라고...연민에 휩싸여 그를 받아주는 나나, 룬이라고 생각하고 자지러지는 그나, 나 때문에 절망하고 있을 나의 형이나, 혹은 어딘가에 있을 그의 진짜 룬이나.....모두 못할 짓이고, 모두 불쌍한 일이라고 속으로 한탄했다. 역시 떠나는 게 좋을까... 낮에 사칼의 말이 떠올랐다. "......룬.......룬.....나의 룬..." 그가 다시 내 뺨을 감싸쥐고, 얼굴 곳곳에 키스의 비를 내리고 있었다. 잔뜩 쪽쪽 소리를 동반한 체, 입으론 여전히 그의 이름..룬을 부르며 또다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불같은 열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 난 룬이 아니야." 그가 의아한 듯 잠시 멈칫거린다. 음....이 상황은 마치 내가 룬으로 보이냐~으...으...흐....하는 저질 공포물 같아서, 혼자 웃었다. " 그리고. 당신도 형이 아니지.." 말끝에 사악한 웃음도 덧붙혔다. 암....이 웃음이 핵심이지. " 형이 누구냐고? 아아....글쎄....아마도...사랑하는 사람?... 믿을 수 없다는 눈치네....솔직히 나도 그래. 평생 사랑이라는 말 못 할줄 알았는데, 떨어져 보면 안다고.....형이 없는 곳에 있으니깐....알겠더라..그게 사랑이고, 사랑이었다고. 인간은 항상 뒤늦게 깨닫지. 그게 바로 큰 흠이고. " 그는 여전히 고요하게 숨을 죽인 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이왕이면 내 몸 위에서 내려오면 좋으련만 그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자.....말하자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룬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형인데, 우리 둘 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 말이야. 덧붙여 한 백만번 말하지만 난 룬이 아닌데 말이지. 하지만 굳이 이 몸 때문에 발정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왜냐면. 그건 강간이니깐." 뭐...말릴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일까. 맘대로 하세요. 하고 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내 말 중간중간 화를 참고 있었다. 그의 멋진 가슴근육이 꿈틀대고, 몸을 지탱하는 팔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말로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동안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가 턱이 부셔질 정도로 악물고 있던 입매를 천천히 풀면서 말을 꺼냈다. " ...............네게서...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니...더욱이 강간이라니.." 어느새 또렷해 진 그의 음성이 침통함을 담은 체 뱉어지고 있었다. 흐느끼듯 울리는 그의 간헐적인 목소리에 마주 안아주고 싶은 유혹이 빗발처럼 가슴을 쳤다. " .........난 룬이 될 수 없어. 혹.....일말의 희망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유감이야" 얄밉도록 냉정한 내 입술이 못내 원망스러웠지만 의지를 다졌다. 날 보며 그리움에 가득 차 룬을 떠올리는 그의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참아줄 수 없었다. 이것이 질투라는 감정이라는 게 문득 떠올랐지만 아무렴 어떤가. 사실인걸. " ............................." 내 말에 아무말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돌연 내 턱을 거센 악력으로 부여잡고 깊은 입맞춤을 시작했다. 치열을 더듬고, 혀를 얽으면서, 목구멍 깊숙이 찔러 넣기도 하며 쓰라릴 정도로 세게 훑고 있었다. 그 바람에 또 신음이 흘리고, 그게 신호인양 배며 허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유두를 집요하게 지분대고, 그의 다리는 어느새 내 중심부위를 비벼대고 있었다. 윽..소리가 날만큼 거친 행동이라 흥분따위 느끼지 못했다. " .........그래? 룬이 아니라고? 하.. 그렇다면 강간 성립인가? 더 흥미롭겠군. 안 그래?" 그가 잠시 입술을 뗀 틈을 타 빠르게 내 뱉은 말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아....화낸다고 될 일이냐... 역시 혼자서만 한탄했다. " 웃기지마.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지? 너만 옆에 있으면. 아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묶어두겠어. 룬이 아니라고? 하......상관없단 말야. 알아?" 발작적인 웃음과 함께 미친 듯이 내 몸을 비벼대는 그의 몸짓이, 말과는 달리 간절하고 다급했다. 그리고 그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리지도 않는 아픔에 찬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와 또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그래도 난 마지막 말을 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 그렇다면..다행이지만, 당신 중요한 걸 빼먹었네." 낮은 내 목소리에 무엇을 예감한 듯 그의 거친 행동이 순식간에 멈췄다. 내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가 번쩍 치켜들면서, 내 눈을 마주 쏘아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나 절박했다. " .............하지마." " .........난......." " 말하지 말라고!!!!!" 그가 천둥같이 소리치며 내 목을 움켜잡았다. " 당신을...사랑하지 않아." 목을 잡히는 바람에 희미하게 울려 퍼진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알고 있잖아." 다시 한번 힘겹게 내뱉은 말에 그가 순간 숨을 훅 들이키더니, 그와 동시에 그의 다른 한 손마저도 내 목을 움켜쥐고 양손으로 조여오기 시작했다. 아.... 순식간이라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다. 설마...내 목을 조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하긴 예측대로 돌아가는 인생이 어딨겠는가. 또다시 영감 같은 생각을 하며 내 목을 조르는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아마도 그와 더불어 함께 구겨져 있을 내 얼굴이 눈에 선했다. 내 아픔도 좀 알아달라고 투정부리지 않겠지만... 이봐.....당신만 아픈 거 아니야. "윽...." 아아...정말 괴롭다. 젠장...진짜 괴롭다. 숨이 버거운 건 둘째치고도 툭 튀어나온 목 뼈를 누르고 있어서 마치 꼬쳉이에라도 꿰인 것처럼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고로 이곳에 온 거라면 그와 버금가는 ....이를테면 생명의 위협이라든가...딱...죽기 직전만큼만 사고를 당하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그 와중에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 허억...하아...하아........흑...으.....윽.........하아.." 순간 페 가득히 들어차는 공기에 괴로움에서 해방됐다. 목을 움켜쥐었던 손은 벌써 주인을 따라 침대 아래로 내려섰고, 라일은.....그는.....이미 술이 깼음에도 비틀대다 탁자를 치는 바람에 찻잔 하나를 떨어뜨려 깨뜨렸다. 숨을 들이마시느라 정신이 없는 나를 보지도 않은 체 여전히 비틀거리며 급한 걸음으로 막사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내 목을 조르면서 스스로도 자신의 목을 졸랐을 그의 절망적인 아픔이 느껴졌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회상 (3) 그 날로 그는 날 데리고 서울로 갔다. 그의 얼굴도 보지도 않고, 그의 말도 무시하는 나를 억지로 차에 태워 그렇게 그의 집으로 데려갔다.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작은 오피스텔..그 작은 공간에 여기저기 박스가 널려있었고, 아직 포장이 안 풀린 꾸러미나 새 것 같은 식기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엄마의 자살 뒤 바로 자취를 감췄었다. 한동안 방황하느라 아빠의 사고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후에 유산으로 남은 엄청난 재산은 장학재단에 몽땅 기부하고 홀홀단신 무일푼으로 온갖 잡일을 다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고시원을 떠돌며 춥고 배고픔을 이겨내며 그도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작지만 제대로 된 집을 구해 나를 데려오게 된 거라고 말했다. 사실...알고 있었단다. 이미 오래 전에 내가 있던 곳을 꾸준히 조사하면서 언제든 데려오겠다고 결심했단다. 하지만,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괴로워하는 것들과, 내가 그를 볼 수 없어 하는 것과,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 모두를 알고 있었다. 고시원에서 새우잠을 잘 때나, 혹여 나와 비슷한 남자를 보게 될 때면 미친 듯이 달려가 안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다면서, 그래도..생활이 안정될 때까지만 참아보자고, 그러면 나도 많이 나아졌을 거라고 그렇게 위로하면서 바쁘게..힘들게 살았다고 했다. 여전히 아픈 얼굴로 기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또 다른 의미로 그에게 짐이 되는 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면....차라리 내가 그 사랑을 받아주지만 않았다면 그는 나를 마음놓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할텐데...오히려 날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아파하고 있었다. 날 보면 떠오르는 엄마의 자살, 아빠의 배신, 그리고 저주스런 나의 친모 때문에 괴롭고 절망스러울거고, 그렇다고 안 보면 사랑에 목말라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아픔에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딜레마에 빠진 그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가진 죄악의 씨앗, 그 죄책감은 그의 고통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존재였던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난, 같이 아프자고, 나 혼자 도망가지 않겠다고, 회피하지 않고 현실을 맞아들이겠다고 결심하고 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의 아픔을 보며, 그의 사랑을 느끼며 내 상처가 고름처럼 터져 나가도 그를 바라보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다짐시켰다. 넌 그의 연인이 아니야. 과거의 집착이거나, 버릴 수 없는 낡은 물건 같은 거지. 무조건 그의 말대로 따르는 거야. 그에게 평생 사죄하는 거지. 네 인생은 그에게 저당 잡힌 체 그냥 그렇게 인형처럼 살아. 사랑은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아주 극악한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그가 몇 일 후 나를 안으려고 했을 때, 그걸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고, 나 역시 감히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다. 돈을 달라고 했다. 얼마든...날 안으려면 돈으로 사라고...남창같이 하룻밤 쓰고 버리는 존재로 생각하라고 ...그의 가슴에 그렇게 비수를 꽂았다. 내 말에 충격에 휩싸인 그는 한동안 날 보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어느 날 봉투로 한가득 돈을 던져 주면서 아주 거칠게 내 몸을 안았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욕망과, 내 말로 인한 상처와, 더 오래 전 그 아픔이 뒤섞인 그와의 섹스는 굉장히 아프고 아파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두고 그, 만 울었다. 나는 울 자격도 없었다. 울음으로...한낱 눈물 따위로 고통을 덜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따로 섹스파트너를 두고 나한테는 다정한 형 노릇으로 만족하려는 듯 했다. 내가 거부하는 만큼 그도 참아 보려고 애를 썼었고, 간단한 포옹도 없이 그저 형, 동생으로 몇 달간을 지냈다. 그리고 그와 산지 1년 후쯤, 나날이 시들어 가는 나무 같은 나를 보며 그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안을 땐 돈을 주고 사고, 사랑한다는 말도 안하고, 평소에도 동생같이 대해주고, 가끔의 섹스만 빼면 형제간으로 살자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 대신 학교도 마치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 본래의 밝은 내 모습으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었다. 난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겠다고, 누구 말씀인데 당연히 그러겠다고 ..환히 웃으며 말했었다. 그렇게 형은 날 놓아준다고 했다. 내가 원한다면 놓겠다고 말했었다. 비록 형식적인 약속이었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난 대학을 마치는 대신 그의 회사에 알바를 하게 됐다. 처음엔 반대하던 그도 내심 반기는 눈치였고, 여자친구들도 많이 만들었다. 애인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나도 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10일간의 텀을 두고 그와 몸을 섞었다. 그는 매번 꽤 많은 돈을 냈고, 그 돈이 모아져 내가 따로 나가 산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내가 집을 옮긴 뒤 그와의 잠자리는 호텔이나 모텔, 혹은 차안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어느 집이든 싫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만 빼면 누가 보나 형제사이였다. 그는 형으로서 날 아껴주었고, 난 동생으로서 그에게 의지하고 어리광을 피웠다. 모든 게 내 바람대로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안으로 곪고 있었다. 섞은 고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지, 실상은 얼만큼 문드러졌는지 알고 있었다. 다정한 형제인 척 온갖 위선을 떨다가, 몸을 섞을 땐 미치광이처럼 달라붙었다. 밤이 새도록 물고 핥고, 빨아대면서 누구의 몸인지도 모르게 될 만큼 한 몸이 되면서도 다음날이면 깔끔하게 형제로 돌아가는 우리는...정말 미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형에 옆에 누워 잠들지도 못하는 내 강박관념은 그를 지치게 했고, 나날이 음란해지는 섹스의 탐닉은 서로의 몸에 흔적을 남겨 욕망을 부추겼다. 그와 나의 상처는 각각의 마음 속에 더욱 그 크기를 달리했고, 우리는 어쩌면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온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 자리도, 행복이라는 기쁨이 있을 자리도 이미 빼앗겨버린 우리의 마음속은...폐허나 다름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가 못 듣는 줄 알고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그러면서도 그의 몸을 품고 한껏 조이면서 신음인양 대답하는 내 사랑은 못 알아채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엇갈리면서, 아픔을 피하지도 않고, 정면승부로 몸이 너덜너덜 해져도 우리는 그 자체로 만족했다. 아니....적어도 난 만족하고 있었다. 밤새 무릎에 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결론이 났다. 그도 ...나도...점점 지쳐가는 이 마당에 여기 눌러 앉아 뭐 하자는 건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등불이 다 태워지고, 어스름한 새벽의 기운이 지나는 지금.....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아침에 예의 차려가며 방문할 때까지 기다리면 하지 못한다. 사칼에게 가야했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가서..... 떠나겠다고 말해야했다.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내 이성을 잠식하기 전에.. 애써 무시한 체 형만 생각하려는 내 얄팍한 술수가 탄로 나기 전에.... 어서 ....어서 결심을 알려야했다. 몸을 일으키려는 데 생각보다 힘들어서 좀 시간이 걸렸다. 목도 많이 부어오른 상태라 목소리가 거의 나오질 않았고,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 것 마냥 근육이 당겼다. 리네가 놀랄까봐 아.아. 목소리를 다듬어 본 다음 막사를 나섰다. 근처 막사에서 잠이 덜 깨 어리둥절한 리네를 재촉해 사칼의 막사로 안내하도록 했다. 리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놀라는 것 같아, 감기라고 대충 둘러대느라 잦은 기침도 몇 번하면서 길을 나섰다. 마음의 조급함과 근거 없는 두려움이 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칼의 막사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한 15분쯤 걸어온 것 같았다. 막사 무리와 꽤 떨어진 곳으로 막사 뒤쪽으론 긴 벌판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필시 무리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내, 당신이 부족의 안위 어쩌구 할 때부터 알아봤어. 안위는 개뿔. 완전 개인주의잖아. " 여기이옵니다." " 고마워...리네... 잠 깨워서 미안. 먼저 가 있어" " 저기...하지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걱정말고." 최대한 평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쇠를 긁는 듯이 갈라지고 거친 소리가 새어나왔다. 리네가 잠시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다가 내 재촉을 받고 서둘러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공기 사이로 사라졌다. 숨을 들이 마셨다. 그래도 찬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해주어 결심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음에도 난 갈등하고 있었다. 아니......솔직히 말하자면 오는 내내 고민했었다. 그를 보지 않는 것과.....그의 룬인 척 사는 괴로움 중 어느 것이 힘들지...몇 번을 저울질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핑계와 변명과 얼토당토 않는 이유를 갖다 붙여도 결론은 항상 같았다. 떠나서 대륙을 돌다보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아니, 설사 방법이 없더라도 여기서 그에게 그의 연이었던 룬으로 사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날 그의 룬으로 보는 그 눈빛이 싫었다. 눈을 감았다가 힘겹게 떴다. 마음을 굳혔다. 막사의 문을 조심스레 들췄다. 들어가기 전 기척을 할 까 했지만, 왠지 자고 있을 거 같아 멋대로 들어가기로 했다. 약간 어두운 실내이지만 등불 근처는 밝게 비추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전신을 휘감아 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굳어져 버렸다. 멍한 생각 속에...뒤돌아 나와야 한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다리만 후들거릴뿐 움직이질 못했다. " 읏....읏.....아......라일..라일!!! 거기....잠.깐....윽윽.....하앗.." 침대 위에 근육의 나신들이 얽혀 있었고, 음란한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방안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그만....그만 보고 나와야 해.. 드..들키지 않게... 어느새 여기 온 목적도 잊은 체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이는 말. 하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 라일! 라일! ....아..아...윽....하악..." 침대는 부숴질 정도로 처참히 흔들리고 있었고, 그를 뒤쪽에서 받아들이는 사칼은 침대 위에 꼬꾸라질정도로 역시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그는.......아아.....뭐라고 해야 할지... 사칼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쉼없이 허리를 움직이는 그는....땀에 젖어 더욱 위험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굳은 얼굴이었다. 쾌락..? 물론..있겠지. 사칼이 쉼없이 기뻐하며 조일테니...허리가 녹을 정도로 쾌감을 느낄거다. 하지만 조금도 동요없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 성적행위로 달아오르는 이 공간에서 그만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었다. 문득 사칼이 침대에 박고 있던 머리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커지는 눈도 잠시, 금방 부드럽게 눈을 휘고, 벌려진 입술이 살짝 당겨진다. 그 웃음으로 말하고 싶겠지. 라일을 가진 자는 나야. 그를 품은 건 나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려 더 신음하고 싶겠지.... 그는 몸을 잔뜩 뒤로 젖히며 유연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사칼이 쇠된 소리로 라일의 이름을 부르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기뻐할 때, 그는 단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안으로 숨죽인 신음을 흘렸다. 알겠다.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참을 대로 참은 욕망이 터져 나와 내가 준 애무와, 내가 준 상처와, 나를 상처 입힌 그의 고통이 섞여 촉발된.... 처절하고 음란한 접촉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 아아악. 아아...아아아아. 라일!!!!...라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절박하게 울리는 사칼의 신음소리가 어느덧 비명으로 바뀔 즈음. 그도 한쪽 눈썹을 찡그린 체 한껏 뒤로 물러났다가 한번에 박아 넣으면서 온 근육을 수축시키며 절정에 도달했다. 한동안 몸을 떨며 움직이지 않던 그가 사칼을 잡은 손을 풀면서 거칠게 몸을 빼냈다. 그 바람에 사칼이 풀썩. 침대위로 쓰러진다. 그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침대에 내려서서 옷가지를 잡으려다, 그제서야 내 쪽으로 시선을 줬다. 내 표정이 어땠을지...모르겠지만... 그의 휘둥그레진 눈과 마주친 동시에, 전속을 다해 그 막사를 뛰쳐나왔다. 그 바람에 걸친 모피 이불이 나뒹굴렀지만 상관 안 했다. 이 따위 것.... 저 따위 것. 아무 것도 상관 안겠다고 이를 악물며 뛰어갔다. 사칼의 막사 뒤로 펼쳐진 설경.. 무릎이 파일 정도인 그 눈 덮은 벌판을 구르듯이 뛰어갔다. 자꾸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눈덩이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떠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대로...사칼이 해준다던 차비고 뭐고 다 필요없이 이대로 떠나도 무방하리라. 힘겹게 눈을 헤치며 생각했다. " ........룬!!!!!!.....안돼.........룬......룬.!!.." 그의 외침이 거의 지척에서 들렸다. 맹수가 우는 소리 같았다. 그렇게 처절하게 불러봤자, 이미......이미....난 알아버렸어. 어떤 형태든 당신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다 소용없는 짓이야. 미친 듯이 뛰고...그러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뛰고 또 구르고, 차라리 몸부림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난 정말 사투를 벌이듯 눈 사이를 헤쳐갔다. " 룬아!!!! 룬!!! 아아...그만....룬아!!!!!" 이젠 그가 뛰어오는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따라잡혔다. 내 숨도 턱 밑까지 차서 가슴이 뻐근했다. 아아.....안돼.. 잡혀버리면 끝장이야. 더...조금만 더... 더 ...가야 하는데.... " 룬!!" 순식간에 덮쳐온 그의 몸 때문에 같이 눈밭을 나뒹굴었다. 동시에 그의 팔이 나를 칭칭 동여매고 그의 다리가 역시 나를 옭아맸다. " 하아.....하아....학...." 머리위로 가뿐숨을 내쉬는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 나 역시도 숨을 들이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떠나야 해. 그에게 팔이 잡혀있어 머리를 들이밀고 다리를 동동거리며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 ...하악....그만...그만해..룬아.. 잠깐...아.. 룬아!!! 그만.!!!" 그가 내 팔을 억세게 잡아 흔들며 내 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 여기...여기서 더 가면 안돼. 이 곳을 넘어 눈이 없는 곳은 온통 짐승 천지다. 하아.. 더..더 가면 죽어. 알아? 죽는 다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뒤쳐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어? 일단....일단 돌아가자..응? 룬아. 돌아가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나신은 차갑게 얼어가 붉은 빛을 띄고 있었고, 나 역시 입술이 떨릴 정도로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거의 애원조로 말하는 그를 보고..... 다시 옆의 설원의 대지를 보곤...... 그 너머 검게 그을린 숲의 그림자도 본 후...다시 그를 올려다보며.....담담히 말했다. " ........사칼이랑....좋았어?" 불현듯 떠올라 묻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내 갈라진 목소리 때문인지 내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아, 둘 다 일수도 있겠다. " 말해봐....그랑..좋았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대답을 강요하는 내 모습에 그가 괴로운 듯 고개를 돌렸다. 나도 참 웃기는 짓이라는 거 안다. 난 룬이 아니네, 그러니 너랑 못 자네,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다네 어쩌구 해놓고, 죄 없는 라일만 나무라는 꼴이 아닌가. 그가..거부하는 널 두고 다른 사람이랑 잤기로소니, 바보같이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도 가지 못하게 하는 놀부심보였다. 남 주긴 아까운 떡이라는 거냐. 아아...변덕스런 맘이 또 화를 자초하는 군. " .............안 좋았어. 그러니 그..만..가자."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번엔 저항하지 않았다. 그도 안심한 듯 나를 안고 서둘러 막사를 향해 걸어간다. 안 좋았다면서..왜 했냐. 무심한 타박을 줘 볼까 심술맞은 생각도 들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새벽녘에 도피는 이걸로 끝이군. 그의 품에서 바라본 뒤편 설경이 눈에 밟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차가워진 몸에 덮혀지는 따뜻한 모피이불을 느끼며 잠이 든 건지 정신을 놓은 건지 모를 수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잠들어 있는 나를 향해 꽤 많은 말들을 했다. 룬과의 사랑 이야기.....자신의 과거 이야기....마치...독백인 냥 뱉어지는 말은 혹, 내가 들어줬으면 하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체 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사칼과 처음 몸을 섞은 건......15살 되던 해였을 거다. 독초를 잘못 먹었는데....괴상한 환각과 지독한 욕정을 불러오더군. 그때 스스로 나를 받겠다 했던 녀석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이 부분에서 난 그의 둔함에 쯧쯔쯔...혀를 찰 뻔했다.) 어릴 때부터 형제 같던 친구를...내 욕망을 푸는 도구로..이용했다는 사실은 꽤 충격이었어. 그런데...그가.. 그러더군. 같이 자라면서 같이 생활하고, 같이 전쟁에 나가, 같이 좌절하고, 같이 승리한 우리가.....같이 욕정을 푸는 게 뭐 그리 잘못됐냐고.....오히려 되려 큰소리라.. 내심 안도하는 한편,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었다." 그때가 생각나는지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로써 사칼의 외사랑이 언제부턴지 감이 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내주던....사칼의 모습이 상상돼, 문득 측은해졌다. 물론 그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그를 알기에, 동정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외사랑이 룬으로 인해 더 힘들어졌을 게 뻔해서 굉장히 운이 없다 싶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한창 그 나이에 넘치던 혈기를 같이 풀었지. 여자들이야 많았지만, 과격하고 거친 행위를 감당했던 건 사칼뿐이었다. 그러던 중 네가 오게 되고, 너를 몰래 마음에 품게 되면서 더욱 사칼을 찾는 날이 많아졌다. 순수하고...굉장히 여린 너에게...차마 내 더러운 마음을 보일 길이 없어서...거의 매일밤 그를 범하며..머릿속으론 너를 안았다. 하지만 맹세코. 너와 인연을 맺은 그 후부터는 절대 그를 찾은 적은 없었어. 다시는...그를 찾지 않겠다고..아니, 이젠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네 얼굴을 마주하며..멍하니 다짐했었지.. " 하지만...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음...이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잠결에 뭐라 말했던 것 같았다. " 룬도........나의 룬도...모르는 일이다. 사칼과의 관계는 오직 우리 둘만 알고 있지. 네게...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그냥....너에게 손을 댈 만큼....내 손으로 네 목을 조를 만큼...이성을 잃어버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 부들거리며 떠는 손과...그 와중에도 어이없게 흥분하는 내 몸과...너에 대한 걱정으로 온통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들어 무작정 그를 찾았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몇 년만에 그를 다시 안아버렸어. 그에게 몸을 묻고도 중간중간...차갑게 식어 가는 머릿속 생각이 몸서리치게 가슴을 후벼파, 견딜 수가 없었다...." 침통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작아진다. 응.....응......중간 중간 맞장구 치다가 그의 목소리에 나도 가슴이 아파서...너무 아파하지 말아요....라고 했던가...아니면...슬퍼하지 말아요..라고 했던가..어쨋든 내 말에 그가 숨막히도록 껴안아 오는 걸 느끼면서 완전히 잠들어버렸다. 다음날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들어올려,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음날이라 해봤자, 새벽녘에 한바탕 달리기 한 뒤로 자버린 거니깐, 대략 늦은 오후쯤이었다. 언제 나갔는지 싸늘히 식은 옆자리를 매만지며, 지금이라도 사칼에게 가야하나 망설였다. 아아....얼마전까지 급했던 마음은 이미 확 사라져버린 터라, 아니...무엇보다도 그에게 안겨있던 사칼의 모습이 생각나 당분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에라..모르겠다...하며 도리질을 치는 순간 그대로 꼬꾸라졌다. 젠장..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계속 이 말만 맴돌았다. 목에 손을 가져가 보니 붓기는 가라앉은 거 같았지만 목을 움직이는 게 좀 힘들었다. 게다가 거울이 없어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그의 손자국이 선명할 거다. 한숨을 흘리며 어디 가릴게 없나 주위를 둘러봤다. 리네에게 들키면 굉장히 시끄러워질게 뻔한데다, 그가...그가 보면 나보다 더 아파할까봐 필히 가려야 했다. 할 수 없이 허리를 묶는 끈으로 목에 두르고 리네를 불렀다. " .....흠....콜록... 리..네.." 급하게 들어온 리네에게 최대한 감기환자의 모양새로 청승을 떨었다. 침을 넘기는 게 힘들어서 밥은 무릴거다. 아주 묽은 스프를 달라고 했다. 목감기가 심해 넘기지 못하겠다고.. " 아이..참..룬님! 그러게 제가! 몸도 아직 성치 않으신데 밖에 나가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 리네말은 무시하시고 찬 바람을 쏘였으니 당연히 감기가 들지요. 당연히!! 다음부터는 제발!!..소녀의 말은 흘려듣지 마셔야 해요!!! 아셨죠?" 이 기회다 싶게 리네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 콜록....흠흠...리네...나....나 배고픈데요.." 아주...힘없이. 금방 쓰러질 듯 말 듯 꾀병을 부리며 식사를 재촉했다. 정말 배고프다니깐. " 어머..내 정신 좀 봐. 금방 만들어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 내 말에 서둘러 내 침대로 다가오며 말하더니 아주 꼼꼼하게 이불로 나를 싸매고, 이마를 한번 짚어보고는 거기다 쯧쯔 소리도 좀 내던 리네가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막사를 나섰다. 그녀의 활기찬 기운에 기분이 나아져 덮여진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서려는 데 누군가 어깨를 잡는다. ".................................." "...............놀라는 시늉이라도 좀 해봐." 사칼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내 침대 뒤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 온 거지? " 나 지금...꽤 놀란건데.." 구차한 변명을 좀 했다. 사실 놀랄 일이 어디 한 둘인가.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어이가 없다는 뜻이겠지. " 무슨 일이죠.?" "......아아....꽤 정중한데?" 동문 서답인 그의 말에 얼굴을 좀 그었다. 빨리 빨리 용건 말하고 나가란 말이다. 짜증이 치미는 걸 참아내고 생글 웃었다. " 용건." 내 말에 그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낮추며 낮게 말하기 시작했다. " 그 날. 네가 왜 내 막사에 찾아왔는지 라일이 궁금해하더군." 헉..숨을 들이켰다. 딴 데 정신이 팔려 그 생각을 못했다. 내 당황한 모습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죽대는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대충 말했어. 그러니깐... 네가 라일을 찾아갔다가 없는 걸 보고 혹시 내 처소에 있을지도 몰라 찾아 온 거 같다고. 내 막사는 저번에 산책하다가 만난 적이 있어 알고 있다고 둘러댔지. 대충 믿는 눈치지만 혹시 모르니 입은 맞춰 두자고." 다행이다. 사칼과 했던 말이 어떤 방법으로든 그의 귀에 들어갔다면 정말 큰 사단이 나고도 남았을 거다. " 헌데....꽤 놀란 눈치더군. 그 날. 의외였어. 그를 좋아하던 감정은 남아있는건가.?" "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억을 잃은 게 아니야." ".....아아...." " 미친것도 아니야!!!"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쏘아댔다. " 뭐. 어쨌든 그건 됐고, 사실 중요한 걸 알아내서 말야. 혹시 생각이 있을까 해서."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내 침대에 앉아 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곧 그의 숨소리가 내 귀에 닿자, 뭔 짓인가 싶어 몸을 뒤로 젖히려는 데, 그가 낮게 속삭였다. " 주술사 영감말이.......문이 있다는군." 뭐?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사이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그 망할 영감이 오늘에야 말해주더군. 네 주변기운이 이상한 것을 보아, 자기는 진작에 이계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뭐라고?? " 그..그래서?" " .........말 그대로야. 문이 있다고 했어.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계의 문이. 쿠란드 부족 경계선 북쪽에 하스티의 절벽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절벽이 통로라고 했다." 미..믿을 수 없었다. 정말 그런 게 가능할까.... 혼란스러워하는 날 잠시 바라보던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둘러 말을 꺼냈다. " 판단은 네가 해. 난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니깐. 그리고, 내일 반려의 의식이 끝나면 모레아침. 쿠란드 부족으로 보내는 사절단이 출발할 거다. 만약 가게 된다면 넌 나와 같이 그 사절단에 묻혀 가면 된다. 아마..네가 없어지면 라일이 찾겠지만. 라일도 일년에 한번 받는 신탁 때문에 하루 종일 신전에 있을 거다. 별다른 의심받지 않고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어...." 내가 이해를 하던 말던 그는 매우 빠르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 라일이 너한테 붙혀 둔 애들이 있어서, 오래 얘기할 시간이 없다. 그들 눈을 피해 숨어 있다가 간신히 짬이 난 거 뿐이니깐, 대충 알아들었으면 반려의 의식이 끝난 다음. 붉은 끈을 내 처소로 보내. 승낙의 의미로 알겠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서둘러 문을 나섰다. 어쩐지..안절부절 주위를 둘러보며 다급히 말을 하더라니......아마도 보호를 빙자한 감시차원이겠지. 쓰게 웃었다. 또 도망이라도 갈까봐 안심이 안되나 보다. 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리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 오래 기다리셨죠?" 방긋 웃으며 내 곁에 다가와 서는 리네를 보며 왠지 그녀가 부러워졌다. 아무 걱정도 없는 듯이 해맑게 웃기만 하는 그녀가 내 어지러운 머릿속과 너무 대조적이라 많이 부러웠다. 다가온 그녀가 던져진 이불을 보더니 또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까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형.. 어떻게 할까... 점심을 먹고 그가 올까 싶어 기다렸지만, 밤이 늦도록 그의 방문은 없었다. 좀 쓸쓸해진 기분에 리네와 수다를 좀 떨다가(.거의 내가 듣는 편이었지만) 잠을 자려는 데 오지 않을 줄 알았던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 서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안했다. 어서 와요...도 이상하고. 왜 이제 와요..는 더 이상하고. 무슨 일이에요? 는 너무 격식을 차린 말이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도 딱히 할말이 있는 건 아닌지, 들어온 그 자세로 바라보기만 하더니 천천히 탁자를 돌아 내 침대로 걸어왔다. 그리곤, 잠잘 채비를 끝낸 내 모습을 흘끗 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옷을 벗었다. 긴 망토를 들어내고 끈을 풀어 겉옷을 벗고는 신발을 벗고 스스럼없이 내 침대 위에 몸을 묻었다. 약간 경직된 체 물러나는 나를 따뜻하게 품고는 그대로 참을 청할 듯 미동도 없이 누워버렸다. "................................" 같이 자자는 건가. 아무것도 안하고? 뭐, 불순한 의도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날 안고 잠이 들려는 모습 자체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 ........내일...반려의 의식이 있는 걸 알아.?" 한 손으론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머리는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린 그가 말했다. " 리네한테 들었어요." 수장의 반려의 의식. 그건 단순히 그들이 반려를 맺은 것을 기뻐하는 기념의식은 아니다. 수장이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는 건 부족 전체의 안정이자 평화의 상징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수장이라는 자리가 완성된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반려의 의식 다음날엔 수장이 신탁을 받기 위한 기도를 하는데, 그의 마음과 힘을 굳건히 하여 한해도 무사평안하고 번창하는 부족이 될 것을 기원하는 하나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리네가 온 부족의 사람들이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한 즐거운 하루가 될 거라고 신이 나 말했었다. 그리고.... " .....합방도 해야 하는 걸 아나.?" 역시 반려의 의식답게 이 부분을 빼놓을 수 없겠지. " 네. 리네가 신신당부를 하던걸요." "......뭐라고.." 밤이 되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간단한 절차가 있을거란다. 그해에 루스틴에게 줄 색깔을 선정해 그걸로 만든 비단끈을 루스틴의 허리에 묶어주면 바로 막사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주는 걸 귀로 들으면서 일을 치러야 한다나.....그런 쪽팔린 짓을...하고 경악했었다. " 그 어느 때보다 정성 들여 모셔야 한다고 아주 엄격하게 말했어요." 그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 등을 쓸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뭔 소린가 싶어 가슴에 붙힌 머리를 들어 그를 마주봤다. " 물론....합방하는 척은 해야 할거다. 하지만....네가 원치 않으면 안지 않아."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올려 짧은 입맞춤을 하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러나 싶어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 널....더이상 룬으로 볼 수 없으니까." "......................." "........더이상..괴로운 것도 싫고, 널 상처입히고 싶지도 않고, 그냥 지금...바로 이 순간만 마음에 두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급할 거 없어 전혀. 시간을 두고 천천히....널 얻기만 한다면 그까짓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 결심어린 말에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그러니깐..룬..우리 같이 ...같이 노력해보자. 응? 그건 할 수 있겠지. 그냥...친구처럼.....아니 가족처럼 서로를 위해주고, 아껴주고, 그러다 보면...다시 연인처럼..그렇게 되지 않을까.? 다시...아니,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 그의 넋두리같은 말이 잔잔한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래...정말 여기서 살다보면...그를 사랑하게 되고, 이곳도 정들게 되고,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한순간 희망이 보이는 듯해서 또다시 머릿속은 전쟁이 났다. 그래봤자, 넌 룬의 그림자일뿐이야, 룬의 대용일 뿐이라고 사칼이 속삭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형의 환영이 눈물로 바다를 만들 듯 처참한 형색으로 비통해하고 있었다. 갈팡질팡 하는 마음이 파도처럼 흔들리면서 끝없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나와는 달리 라일은 곧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갔다. 낮게 오르락거리는 그의 가슴이 왠지 진정한 안식처 같은 느낌이 들어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유혹이 더 거세졌다. 정말 어떡하냐.....나. 그의 품에 안겨 단잠을 잔 후 일어나게 된 건 의외로 아침 일찍이었다. 물론 자의가 아니라, 리네의 호들갑 때문이었지만. 그는 이미 일어나 여기저기 시종들이 들고 있는 천들을 부산스럽게 걸치는 중이었고,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리네의 잔소리에 귀를 후벼줬다. ......정말 졸리다고..리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건 아침밥이 왔을 때다. 허기진 배에 식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곤 바로 몰입해서 걸신들 듯 먹어버리고, 라일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상한 천들을 치렁치렁 걸쳐야 했다. 보석인지 보석 비스무리한 돌맹인지 모를 장신구까지 걸친 후 밖으로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축제분위기가 가득했다. 라일의 막사 앞에 널따란 공터가 생겼고, 중앙에 따뜻한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피가 깔린 의자와 탁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축제라더니, 정말 밖에서 할 모양으로, 군데 군데 추위를 녹여줄 모닥불이 수백개는 되는 듯 했다. 공터에선 검을 둔 전사들이 검투라도 할 요량인지 잔뜩 모여있었고, 색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은 작은 북이며 피리 같은 것을 꽤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있었다. 제일 상석으로 올라가 모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앞을 보니 그리 높진 않았지만 사방으로 트인 시야로 저 멀리 설경까지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꽃이 곳곳에 놓여 있었는데, 날카로운 가시 덩쿨에 군데 군데 붙은 굉장히 붉고 작은 꽃이었다. 겨울에 꽃이라니.....내 말을 들은 그가, 벨라라는 꽃이라고 슬쩍 귀뜸해 줬다. 겨울에 피는 꽃으로 생명력이 질겨, 불멸과 절개를 대표하는 꽃이란다. 넋 놓고 보고 있었다. 크기만 좀 크면 장미같다고 생각하며, 향기도 있을까 해서 얼굴을 가까이 가다가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라일이 손을 뻗기 전에 방울져 꽃 위에 떨어진 내 핏자국을 보며.....뭔가.....그래...선인이었다면...깨달음이랄까....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으론 멍하니 그들의 검무와 검투를 지켜보며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고, 라일과 마주보며 웃어주면서도...내 머릿속은 한가지 깨달음에 전율했다. 그래...난 사람이다. 가시에 찔리면 피도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사고로 죽었다고?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했냐 말이다. 내세에 온 거라고? 이계에 온 거라고? 그래서 여기서 살아보겠다고? 아니....어떻게 그런 생각으로 체념했냔 말이다. 난...난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온전히 내가 살아온 세월을 간직하고 있고, 내가 지켜온 것들도 여전히 남아있고,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것들을 버리려 했단 말인가. 아니...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두고 갈등하다니...이런 바보가 또 있을까. " 와아!~~~~!!!!!" 순식간에 울려진 함성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우승자인 듯한 사람이 직접 단상에서 내려간 라일에게 검을 하사 받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저 사람. 그가 날 갈등하게 했지. 한순간이지만 여기에 남고싶다는 생각도 들게 했어. 넋 놓고 바라보다 돌아서는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겨울답지 않게 찌르는 태양 속에서 화려한 금빛을 출렁이며 미소짓는 남자. 같이 웃었다. 사칼이 말한 문이라는 게 상식적으론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것부터가 상식이란 게 통하질 않았다. 어쩌면 사칼이 라일에게서 떨어뜨리게 할 목적으로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쿠란드 부족에 사절단으로 가는 길에 데려가려는 요량으로 쿠란드에 문이 있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거짓이면 일단은 대륙으로 떠나보겠다는 원래의 계획대로 일 테고.. 진실이면....난 ...그래..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손해볼 장사가 아니지....사칼을 믿든 안 믿든, 문이 있든 없든, 일단 떠나는 데 의의를 두면 그리...혼란스러울 것도 없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화려한 검무와 춤들이 오전 내내 계속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떠들며 음식을 나눴다. 오후엔 장로회를 중축으로 한 작은 회의와 토론이 있었고, 해가 뉘엿뉘엿 할 즈음, 술과 고기가 펼쳐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아.?" 맛깔나는 고기 바비큐를 맛있게 먹고, 견과류와 과일을 섞어 만든 술을 벌컥 벌컥 들이마시는 나에게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 아뇨. 재밌는데요." 사실이었다. 재밌다. 술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고, 라일도 멋지고, 모든 게 좋았다. 아...저기서 노려보는 사칼은 좀 빼고. "............술을 잘 하는군." " ...하하...제가 좀 말술이라...." 그는 놀랍다는 듯 내가 벌써 몇잔째인지 모를 술잔을 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생경하다는 표정에 뭔지 알 것 같아 물었다. " 룬은 술을 못했나 보죠?" 내 말에 그가 좀 침묵하다가 자신도 술잔을 들이키곤 대답했다. " 전혀. 입에도 못 댔어" " 저런.....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인데....아쉽네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내 말이 웃긴지 잠시 어깨를 들썩였다. 횃불은 점점 타오르고 무희의 춤은 더욱 농염해졌다. 공기는 밤이 되어 더욱 추워졌지만 따뜻한 모피이불과 모닥불로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술이 약간 오르는 듯 뺨이 살짝 더웠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탁탁 불꽃을 튀기며 타는 모닥불과, 무희들의 정열적인 춤.....그 바람에 아이들을 재우려는 엄마들의 모습과 호기심으로 버티는 아이들. 참......인간적이고 평화로운 한 때를 보는 것 같았다. 또한 실감나는 현실이었다. 머릿속에 새겼다. 절대 꿈이 아니라고... 돌아가서도 확실히 기억하자, 절대로 꿈일 수 없다고...... 밤이 한참 깊어지는 가운데 사칼은 라일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 오늘 밤 결정. 잊지마." 하고 재빨리 속삭이고 지나쳐갔다. 그의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나 이미 결정했소.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찌나 재빠른지...날렵한 표범같았다. 빨간색의 표범이라니...엽기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고 하는 동안. 때가 됐는지 장로회의 어른들이 자리를 정비하고, 라일이 이끄는 데로 그의 막사 앞으로 향했다. 의식은 간단했다. 장로회의 꼬장꼬장한 노인의 잔소리 같은 연설을 들은 뒤, 아마도 사칼이 말했던 주술사 영감이라는 노인의 희한한 주문을 다음으로...장로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 앞에서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그들이 씌워주는 벨라의 화관을 끝으로 의식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흰 천으로 만든 끈이 풀려나가고, 빨간색의 끈이 허리에 묶여지면서 모두가 축하의 말을 하고, 흥겨운 피리소리가 울리면서 그와...아마도 처음일 반려의 의식을 마쳤다. 반려의 의식. 영혼을 묶어주는 강력한 굴레. 인상깊었다. 왠지...그와 더 가까이 연결이 된 느낌이 들어서, 가슴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축복의 말이라지만, 야유 같은 함성을 들으며 그와 함께 그의 막사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진짜 쇼타임이라 이거지. 난감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또 뭐랄까...음.....부인하고 싶지만 기대가 되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으로 그가 이끄는 데로 침대 위에 앉았다. "....피곤했지? 이제 다 끝났어. 넌 몸이 약해서 찬바람엔 안 좋다는 거 항상...아!!" 그가 무척 염려가 된다는 듯이 내 몸을 여기저기 주무르면서 말을 하다가 입을 서둘러 닫았다. 그리고 난 담담히 물었다. " 룬이 항상 힘들어 했나보죠? 몸이 많이 약했나봐요." "..........................." 그가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룬의 모습을 한 체로 룬이 다른 사람이라는 냥 말하는 내 모습이 무척 어색하고 이상할테지. 나 같아도 어이가 없겠다. 평소 아는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남인 것처럼 하는 모습. 기이한 경험일거다. " ........음...난 별로 안 피곤한데....몸은 같은 데도 다르게 느끼는 걸 보면 룬은 아마도...그 의식을 즐기지 못한 것 같네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에 불안해했거나, 그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여 정신적인 피곤함을 느낀 거죠. 사교에 별로 능하지 못했군요? 그는." 그는 더더욱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잃은 체 멍하니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룬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더 이상 날 룬으로 보지 못할거라고 했으면서도 여전히 그는 조금이라도 내가 다른 행동을 보이면 할말을 잃는다. 역시 그에게선 룬이 전부였다. 내가 아무리 몸만 룬의 모습이라고 말해도. 끊임없이 다른 인격체라고 그를 깨우쳐줘도. 그는 ...여전히 룬을 찾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룬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니...솔직히 믿을 수 없겠지. 상식적으로 통할 수 없는 얘기니깐....나라도 그렇겠다. "........아주....아주 외로운 아이였지. 이곳이 그가 강제로 끌려온 곳이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그는..조용하고 고독하고 여린 게 천성이었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오직 나만이 그에게 전부였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잔뜩 회한이 묻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좀 다른 결심을 하게 됐다. 이대로 내일 내가 사라져 버리면 그는 룬을 잃은 거라고 절망할거다. 아마...나 같은 존재는 언제 있었냐 싶게 금방 잊겠지. 아니, 어쩌면 지금도 룬이 잠시 정신을 놓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예 나라는 인격체. 정원이라는 한 인간이 그의 곁에 잠시 머물렀다는 걸 그는 알지 못할 거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그건 도저히 묵과하고 넘길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애타게 날 알리고, 그의 눈을 덮고 마음을 덮은 룬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보려 했지만 끝까지 내 믿음을 저버리는 그에게 확실히 내 모습을 전하자고.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침대 위에서 천천히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홀딱 벗고 스트립쇼라도 해야할까..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붉은 끈을 풀었다. 음. 사칼이 승낙의 의미로 보내라던 끈이 이것인가 보다. 그가 반려의 의식다음이라 했으니...무엇보다 오늘 받은 거 말곤 붉은 끈이 없었다.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천을 벗어 내렸다. 그제서야 그가 묻는다. " 아....벌써 잘건가.?" ".......네. 라일은 안 자요?" 내 말에 그는 내 침대 가에서 일어나 앞의 탁자로 걸어갔다. 그리곤 털썩 날 등지고 앉아 미리 준비된 술잔을 집어든다. " ...잠이 오질 않는군. 먼저 자." 뒤돌아 앉은 그의 등이 안타까워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어제 말한 것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안지 않겠다는 선언 같아서, 고맙기는커녕 오늘따라 눈치 없는 그의 고지식함이 원망스러워졌다. 원하지 않으면 안지 않겠다라.... 그럼 내가 원하면 안을꺼라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쪽팔린 짓을 해야겠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낯 뜨겁다는 말. 내가 쓸까보냐. 거추장스러운 천을 몇 개나 더 걷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평소에 입던 옷차림이 되었다. 상의는 민소매, 하의는 칠부바지로 모두 하얀색이었다. 일종의 내의 차림. 물론 안에는 팬티라 부르기 민망한 모양새가 있긴 하다. 다만, 그곳만 간신히 덮는 사각의 하얀 천으로 골반에서 양쪽 천 끝을 묶는 형식이 팬티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거 정말 민망한 차림이다. 앞에는 가려졌다 치지만 엉덩이는 반쯤 보이고 왼쪽 허벅지는 다 드러낸다. 또한 마치 미니스커트처럼 밑은 뚫려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게 소름 돋기 딱 좋다. 민소매의 상의를 벗어 던지며 생각했다. 정말 바지까지 벗고 그 민망한 차림으로 있어봐? 얼굴이 달아올라 미쳤어. 미쳤어 를 연발했다. 정말 미쳤냐 너. 바지 벗는 건 참기로 했다. 죽어도 그 꼴로는 못 있는다. 나도 자존심은 있다!!. 상 차려 줬음 됐지, 수저로 떠 먹이기까지 하면 볼 장 다 본 거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라일을 불렀다. " 라일." 내가 부르는 소리에 그의 어깨가 잔뜩 긴장한다. 매번 그를 긴장시키거나 화를 내게 했던 것 같아서 좀 찔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따뜻한 막사 안이라도 밖은 추운 겨울이기라, 아무래도 벗은 상체에 소름이 돋았다. 양팔로 껴안고 슥슥 비비며 그에게 내가 먼저 다가섰다.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왠지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라일이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는 탁자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살짝 내리깐 눈을 들어 지을 듯 말 듯한 미소는 포인트다. 그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 룬! 바닥이 차. 또 옷은 어디다 두고!" 그가 서둘러 자신의 상의를 벗어 걸쳐주고(일부러 벗은 건데..이 사람이.)서둘러 나를 들어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애처롭고 가련한 인상으로 그의 연심을 끓어 올리려던 계획은 실패.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다. " 잠이 안 와.?"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 ..........................." "........나도 같이 자고 싶은데....좀 힘들어서." 물론 이 대목에선 쾌재를 불렀다. 힘들면 안 되지. 그럼.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감았다. 물론 그와 동시에 팔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자, 완벽히 밀착된 그의 몸이 느껴졌다. 가슴 충만한 포옹. 그가 움찔하더니 깊게 안아준다. " ....왜 그래..." 나의 적극적인 몸짓에 그가 뭔가 불안하다는 듯이 달래는 말투로 물어온다. 음...막상 대놓고 말하려니... 줏대 없는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불타는 밤으로 나를 각성시켜주겠다는 유치한 발상을 그렇다 쳐도, 저번엔 강간이니 어쩌니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러다니...참..황당하고 헷갈릴 상황 아닌가. 하지만 그땐, 룬으로서 날 안으려고 했으니 싫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술까지 잔뜩 마신 상태라 차근히 내 존재에 대해 설득할 여건도 안됐었다. 뭐라...한다... 한동안 그에게 안겨 가만히 있었다. 결국에 그가 잠을 재울 요량인지 몸을 규칙적으로 토닥여 줄 때까지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하자고 결정했다. 솔직한 마음은 영혼으로 통한다고. 어줍잖은 꾸밈보다야 백번 낫지.. " 당신은 다르겠지만. 난 오늘 같은 의식은 처음이에요." "....................." 그는 여전히 아무말없이 내 등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 반려의 의식이라는 거. 영혼을 묶는 다죠? 미신 같다고 생각했지만....싫지 않았어요." 내 말에 그가 멈칫 하더니, 고개를 들어올려 나와 눈을 맞춘다. " ........그랬어?" "......네....좀 더 솔직히 말하면....좋았어요. 그렇게 한없는 축복과 기쁨 속에서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인다는 게...굉장히 편안한 기분이었고...또...굉장히 기쁜 것 같기ㄷ..."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가 숨가쁘게 끌어안았다. 통째로 틀어 잡힌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거세게 안겨졌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그의 격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 그러니깐....약속 하나 해줘요. 오늘 하루만." "..........................."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필요 없으니깐....오늘만 약속해주면. ....그러면 좋겠어요. 오늘은....우리가...반려가 된 날이니깐....내가... 처음으로...누군가에게 안주한 날이니깐....." 그렇게 그의 귓가에 속삭이고 살짝 떨어져 나왔다. " 날 .....원이라고 불러주세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오늘만이라도 좋으니깐 나 좀 바라봐 달라고 온 마음으로 애원했다. " ....룬이 아니라...원이로....내 존재를 증명하는 그 이름으로...불러만 준다면..정말 기쁘게 안길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신과...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사랑이란 거............. 평생 쥐어보지도 못할 거라고...평생....나누지 못할 거라고..... 괴로워했지만..지금이라면............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말하는 동안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한 방울 뺨으로 흘렀다. 형 앞에선..자격이 없다고 자학하는 게 전부인 내 사랑이 불쌍하고 애처로워서.....라일..그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 단지...오늘 하루밤만...그와 아픔 없이 온전히 사랑하고 싶었다. 내 눈물섞인 고백에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가만히 손을 들어 내 눈물을 훔쳐 갈 뿐...한동안 차분한 표정으로 미동도 없이 있었다. 오늘 하루도....룬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건가. 참....지독하고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그래서 내가 오늘 하루 만이라고 애원했는데 그것도 안 되는 건가 싶어 울컥 가슴이 타올랐다. 여전히 룬의 그림자이며, 그의 일부이고, 기억일 뿐인 내 존재가 너무도 비참해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의 눈빛을 더 이상은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울려 퍼졌다. "..................................." ".........원이야........." "............................" "...........원이.....나의 원이.....원아........."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봤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내 아픔까지 감싸안고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아아....그래... 이거면 됐다. 이 정도면...이 정도면 떠날 수 있겠다. 미련없이. 기쁜 마음에.... 한편으론 슬프기도 한 마음에.. 그에게로 달려들어 무작정 입술을 찾았다. 팔로는 그의 목을 힘껏 감고, 가슴을 밀착시켜 꼭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힘껏 안아주겠다고.. 떨기만 했다던 룬과는 다르게 당당히 당신을 받아들이겠다고. 바보처럼 미적거린 그의 연인과는 달리. 열정적으로 안겠다고. 급하게 마주 감아오는 그의 혀를 쓸어주며 아려오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 잠깐... 라..라일...읏." 정말 급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절로 인상이 찌푸러졌다. 한동안 몸의 갈증과 나에 대한 배려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하더니, 참을 수 없었는지 결국은 재빨리 몸을 겹쳐왔다. " ....아.....라일....앗.....잠깐. 아파." 향유로 매끈해져 움직이기 어렵진 않았지만, 충분히 넓히지 못한 탓인지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지독히도 아팠다. 그래도 땀으로 젖은 그의 금발머리가 무척이나 자극적이어서 나름대로 흥분중이었다. " 원아.....아....원." 거의 다 들어왔다 싶은 순간, 그가 탄식하듯 내뱉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좁은 내부로 약간 아픈 듯 살짝 찡그린 그의 얼굴이 또다시 기이한 데자부로 나를 몰아갔다. 원....원아......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 위로 환청처럼 형의 목소리가 겹쳐지고 있었다. 형은...항상 나를 안을때면 내 이름을 외자로 불렀다. 원아. 원아...원. 그렇게 부르며 마치 침대에서만 몰래 부를 수 있는 이름인 것처럼. 애절하게도 불렀었다. 깊게 안아오며 서서히 조금씩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며 점점 흥분해가는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품고 있으면서도, 형이 내게 했던 그..애무와, 온갖 음란한 상상들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담백한 그의 움직임에도 극도로 흥분해버리고 말았다. 기가 막혔다. 그에겐 룬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따끔한 일침을 놓은 주제에 나는. 그에게서 형을 찾고 말았다. 형을 기억해내고, 무의식중에 그의 자취를 찾아내고 말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조금 들어올려서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좀 더 움직이기 수월해진 그가 속도를 높여오며 내부를 찔러댔다. 아....발가락이 쫙 펴질정도로 깊은 공격에 허리가 울렸다. 느끼는 데로 조여지는 바람에 그가 나직히 신음을 흘린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그의 긴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얼굴을 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간간히 신음이 섞여드는 서로의 입안에서 쓰라릴 정도로 혀를 부비고 얽히며, 타액으로 질척이는 얼굴을 핥았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격해지면서 딱딱한 침대에 등이 배기기 시작해도 마냥 좋았고, 압사라도 시킬 듯 강하게 죄어오는 그의 팔의 감촉도 못 견디게 좋았다. 그래서 부끄러운 신음소리를 참지 않았다. 밖에 다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고, 라일의 거친 숨소리를 반주삼아 내가 듣기에도 기막히게 야한신음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아마도.. 이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거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게 아름다운 그의 모습을. 그의 젖은 몸과, 하나가 된 이 순간을. 그가 부르는 내 이름, 그의 목소리를.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그는 단잠에 빠져있었고, 난 어스름한 찬새벽 빛으로 그의 얼굴을 꼼꼼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반듯한 이마를 덧그려 보다, 날카로운 콧날을 쓸어보기도 하고, 뺨을 쓰다듬거나, 입술을 만져보기도 하면서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굽이치는 금빛 머릿결에 새삼 눈이 가, 한 웅큼 잡아다 얼굴을 묻었다. 조금만 잘라갈까. 무언가 그를 추억할 게 필요하다. 한동안 진지하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미련이란 건 구차한 거다.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조용히 바라보다, 문득 드는 생각에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붉은 천을 어디다 뒀더라.... 한 곳에 쌓여진 그와 나의 옷더미 속을 뒤져 찾아냈다. 무언가 이상한 말들이 어지러이 적힌 그 붉은 끈을 내려다 보다 뒤를 돌아 라일을 바라봤다. 그의 벗은 어깨선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살풋 웃음이 흘렀다. 그에게 짧은 입맞춤을 보내듯 붉은 끈에 입술을 대곤, 뒤돌아 나왔다. 그리고 그 붉은 끈을 작은 헝겊에 꼼꼼히 싸매고, 조용히 리네를 불렀다. " 사칼님에게.. 이걸 전해주세요." 느닷없는 내 부탁에 리네가 잠시 놀란 듯 말을 걸었다. " 사칼님께요? " " 네.." ".......................저기...." "....별거 아니에요. 약속한 걸 전한다고... 그러면 알 거예요." 룬이 무서워했다던 사칼과 혹시 뭔가 문제가 있었나 싶은지 리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최대한 편안한 어조로 그녀를 안심시키며 길을 재촉했다. 충실한 하인이라 그녀는 반드시 사칼의 막사에 그것을 전해줄 것이다. 서둘러 사칼의 막사로 향하는 그녀를 안 보일때까지 바라보았다. 이걸로....다 끝났다 싶어 찬바람에 몸을 방치하며 오랫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 .........신탁이라는 거...정말 신의 목소리로 받는 건가요?" 새하얗다 못해 빛이 날 지경인 하얀 사제복을 걸친 그가 리네에게 몇가지 지시를 하곤 나를 뒤돌아 봤다. " .......글쎄....딱히 목소리가 들린다고는 못하겠는데.." " 그럼 어떻게 신탁의 내용을 알아요?" 그가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침대 위에 아직도 비스듬히 기대있는 내게 다가왔다. 마주보고 앉아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가 웃는다. " 그냥. 일종의 암시나 징조를 해석하는 거지. 하루종일 신탁의 신전 안에서 기도하다 보면 확실히 느껴지는 암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굉장히 신성한 의식이긴 하지만...꽤 힘이 들어." 기도를 다하고 나올 때쯤이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프다면서 그가 우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즐거운 듯 보여 ...에이..엄살은....하고 핀잔을 줬더니 나를 꽉 껴안으면서 목멘 소리로 ....엄살 아니야.. 하고 투정을 한다. 그런 그의 투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실실 웃음이 흘렀다. 속이 알싸하니 쓰려도 입으론 자꾸 웃음이 났다. 참...요지경이다 싶었다. " 뒤 돌아봐요. 머리는 내가 빗겨줄게요." 그의 시중을 드는 사람한테서 빗을 뺏어 들었다. " ........................." " 내가 해주는 거 싫어요? 그래도 할 거에요. 뒤 돌아요. 빨리. 빗고 나서 묶어요? 아님 그냥 풀러요?" 내 말에 그가 대답 없이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옆에다 데고 물었다. 그의 시종이 그냥 푼다고 해서, 잘 됐다 싶어 그를 재촉했다. " 그냥 빗는 거면 잘 할 수 있어요. 굉장히 부드러워서 한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등을 돌리는 대신 그가 불현듯 짧은 입맞춤을 해왔다. 아랫입술을 빨고 쪽쪽 소리가 나게 귀여운 키스를 하더니 부드럽게 눈을 휘며 나를 마주본다.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쥐곤 가슴 떨리게 멋진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 예쁘다. 원아." 뜬금없는 그의 말이 싫지 않았다. 살짝 웃어넘겼다. 당신도 예뻐. 아주 이뻐 죽겠다고. 할 수 없이 그의 등뒤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역시나, 빗에 걸리는 감촉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정성을 들여 꼼꼼히 빗어 내리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 ....언제쯤 돌아와요.?" " .......음.....너 잘때 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며 말했다. " 오래...걸리네요." "....아아....좀 그렇지. 근데 괜찮겠어?" " 뭐가요." "......하루종일 혼자 있어야 되잖아. 같이 가고 싶지만 관례에 어긋나는 거라 ...." " 괜찮아요. 내가 앤줄 알아요?" 심술 난 척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낮게 웃으면서 ...아아...아직 애긴걸..벌써 다 커버린 거야?.. 하고 능청스럽게 묻는다. 그가 웃을 때마다 등뒤로 금빛이 출렁거렸다. 가만히 쓸어보다가 문득 참을 수 없는 느낌에 등뒤에서 그의 허리를 안아버렸다. 그가 움찔하더니 이내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내 팔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 애 아니라며.. 왠 어리광이야.." 그렇게 핀잔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의 등뒤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어서 그가 말할 때마다 기분 좋은 울림이 느껴졌다. 조금만..더. 이대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곧 리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 이제...나갈 차비를 하셔야 되옵니다. 루스탄님." " 아아..그래." 시간이 되었나보다. 서둘러 그의 허리에서 팔을 거두면서 말했다. " ..다녀와요." 내 말에 뒤돌아보던 그가 짧은 입맞춤을 한 뒤 떨어져나갔다. " 잠이라도 푹 자둬. 오늘밤엔 안 재울거야." 침대 앞에서 겉옷을 입은 후 멀뚱히 바라보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다. " .......저야말로." 그러자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탄성을 내 뱉는다. " 하... 정말 많이 커버렸네. 이젠...아기냄새는 못 맡겠다." 그러면서 킁킁 거리며 내 정수리에 얼굴을 묻는다. 그러고선 얼굴 곳곳에 작은 입맞춤을 남기다가, 입술을 살짝 빨고 떨어진다. " 갔다 올게." 미소를 머금고 그가 작별인사를 한다. 뒤돌아 서서 나가려는 그의 뒷모습에 미련이 솟구쳐 벌떡 일어나 서둘러 다가갔다. 다짜고짜 품에 파고들어 입술부터 찾았다. 잔뜩 까치발을 한 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뜨거운 혀를 감아 올리며 소리없는 ...나만의 작별인사를 했다. 멈칫하던 그가 내 허리를 거세게 감아 들어올린다. 그에 맞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문어처럼 착 달라붙어 완벽히 그를 안았다. 거칠게 휘젖던 혀가 빠져나가고 아쉬운 마음에 그의 입술을 번갈아 빨면서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 곳곳에 짧은 입맞춤을 되풀이했다. 룬도..나도.. 빨리 잊어버려요. 그의 눈을 마주하며 눈동자로 애원했다. 빨리 빨리 잊어버려서 새롭게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간절히 기원했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거 알고 있지만, 끊임없이 들리지도 않는 당부를 그에게 하고 있었다. " 다녀 와요." 그리고 마침내. 밝게 웃으면서 그를 배웅했다. 멀리 나가지 않았다. 그저..그가 내려준 자리에 서서 웃으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봐 줬다. 그게 다였다. 막사의 문이 내려지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몸이 떨릴 정도로 그리움이 밀려들었지만, 참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젠 그를 보지 못해도 그런 것 쯤..아무것도 아닌 듯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내 자신을 타일렀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면서도 그의 뒷모습을 머릿속에 새기느라 차가운 바닥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 ......뭐하는 거야." 사칼이 얼굴을 찌푸린다. " ...........................뭐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느닷없는 목소리에 뒤늦게 대답했다. " 떠나야 된다는 거 모르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거 아냐!!"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안 그래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관계로 사칼의 히스테리는 반가울 것이 못됐다. 천천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 준비는 무슨. 준비랄 것도 없어. 그냥 산책 나가듯이 자리를 떠야 리네가 의심을 안 하지."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두통 때문에 손가락으로 잠시 지압을 해준 뒤 완전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그런 거라면 걱정마. 잠시 잡아뒀으니깐." " 무슨 소리야.?" 사칼의 말에 옷을 입다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며 물었다. 설마..무슨 험한 일이라도 당하는 건가 싶어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 ...말 그대로야. 대충 혐의를 입혀 잠시 감금중이다." " 그렇게까지!!!...할..." " 그렇게까지 해야 돼. 잘못하다간 일이 틀어져버려." "................." "........얼굴 펴. 처소에서 못 나오게 하는 수준이니깐. 시간 지나면 풀어 줄 거야." 사칼의 행동에 화가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으며 침묵하자, 사칼이 누그러진 말투로 말해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작별인사 할 기회는 줬어야지 않나. 괜한 짜증에 말이 곱게 안나갔다. " 아주...준비를 철저히 하셨군." 한껏 비야냥 대는 말투에도 사칼은 개의치 않고 모피외투를 건넬 뿐이었다. " 입어. 밖은 아직 춥다." "......................." "....한 3일은 가야 할 거리야. 그리고, 마을 밖을 나설 때까진 짐차에 몸을 숨겨야 할거다. 불편해도 참아." 말없이 모피외투를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칼의 일행인 듯 한 남자가 들어와 사칼과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더니 서둘러 사라진다. " 이제 가야겠군. 짐차는 중앙공터에 있으니...재빨리 따라와." "......근데 무슨 짐차야." " 뭐...이것저것. 비단, 보석, 칼.. 별게 다 있지. 쿠란드놈들에게 줄 당근이랄까" 말을 마친 사칼이 막사문을 나선다. 뒤따라가며 한산한 주위 풍경에 의아해 물었다. " ......라일이 신전에 간 날이라, 각자 처소에서 좌숙하는 중이야. 신탁 받는 날은 신성한 날이거든. 함부로 행동하거나 말해선 안 되는 날이지. 덕분에 웃기는 변장 안한 거에 감사해라." 퍽도 감사하군. 속으로 비아냥 거렸다. 확실히 좋은 기회임엔 틀림없으니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 여기야." 몇 걸음 안 가서 사칼이 커다란 수레 앞에 멈춰 섰다. 겉을 덮은 헝겊 한쪽을 걷어올리니 과연, 사람하나가 웅크리고 앉은 공간이 비어있었다. 두말 않고, 옆의 두 장정이 올려주는 데로 수레에 탔다. 좀 추웠지만 상관없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사칼을 바라봤다. " ..............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칼이 이상해 물었다. 아까부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닫는 모습이 초조해 보였다. 무슨 표정인지 모를 얼굴로 한참을 내 얼굴만 뚫어지게 보더니 무겁게 입을 연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잠시 놀라다,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물론. 후회 같은 건 없어." "........................." ".......... 그러는 넌?" 내 물음에 그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지더니, 긴 침묵을 사이에 두고 대답이 이어졌다. "......후회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아플 바엔... 무슨 짓이든 해봐야 여한이 없지." 그러면서 미처 뭐라 할 새도 없이 걷어올린 천을 덮어버렸다. 참나...하여튼 자기 멋대로라니깐. 깜깜해진 시야 덕에 약간의 답답함이 있었지만 못 견딜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덜컥 하고 수레가 한번 크게 흔들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옛날 같으면 멀미라도 날 법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구차한 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해서...잠이라도 자볼까 싶어 자리를 잡고 비스듬히 누웠다. 이번 여정은 사칼한테는... 최후의 몸부림이겠지..아마. 아까 봤던 그의 쓴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후회 돼도 어쩔 수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선 별수 없이 나도, 강한 연민을 느껴야 했다. 사랑이란 거 해봤자...피폐한 정신과, 넝마같이 찢긴 마음만 남을 뿐. 한 인간 거덜내기 딱 좋은 재앙이다. 재수 좋으면 해피엔딩. 거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불치병이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좀먹는 질병처럼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사칼이..정말 불쌍했다. 라일도..정말 안타깝고... 나도..정말 딱해.. 한숨이 흘렀다. 젠장. 왠 신파냐. 생각을 털어 내듯 머리를 한껏 흔들었다. 잠이나 자자. 가장 편한 안식처로 가야겠다. 형 꿈이나 꿨으면 좋겠다. 설경이 펼쳐지는 광활한 평야를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뭔가 숲이라 불릴만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에 멋도 모르고 뛰쳐나갈 때, 라일이 경고한데로 이름 모를 짐승떼의 습격이 있었지만 전사들이라 그런지 가뿐히 처리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이동하면 할수록 점점 따뜻해지는 기후 덕에 모피외투를 벗어 던지고, 수레 위의 천을 걷어올렸다. 사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말과 비슷하지만 좀더 털이 길어서 둔해 보이는 짐승을 타고 있었고, 수레가 불편하면 자기 뒤에 타라는 사칼의 말에 두말 않고, 수레에 그대로 묻혀가기로 한 참이다. 사칼의 허리를 잡고 가느니 차라리 수레 안에 짐짝처럼 웅크리고 가는 게 나았다. 가는 중간중간 끼니도 챙기고, 쉬기도 하면서 두 번의 야영을 마쳤다. 슬슬 걱정이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내가 없어진걸 이미 알았을 테고, 보지 못할 광경이지만 그의 슬픔과 분노가 지척에서 느껴지는 듯 해 몸을 떨었다. " ....저 너머가 쿠란드 부족의 땅이야. 오늘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나면 내일 정오쯤에 도착할 거다." 사칼이 사람들에게 야영지를 지시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저 멀리 능선이 하나 보이는데 그걸 말하나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저기 어디간에 문이 있단 말이지.... 어둠이 내려앉고, 모닥불이 지펴졌다. 따뜻해진 날씨 덕에 다들 가벼운 옷차림이다. 참 알 수 없는 곳이다. 한 삼일 떨어진 곳인데도 이렇게 기후가 차이 나다니...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간단히 끓인 묽은 스프를 육포와 함께 저녁으로 먹고 나서 할 일없이 누워있었더니, 사칼이 가만히 다가왔다. " 한 잔 하겠어?" 손에 든 술병과 잔을 들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또 무슨 꿍꿍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내 앞에 털썩 앉아 잔을 내민다. " 받아. 심란해서 한잔 마셔야겠어." "......................" "......걱정돼?" 그가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서 물었다. " 조금." "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 ..............라일이 날 찾으러 올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 " ........그냥.... 괜히 무턱대고 아무데나 휘젓고 다닐까봐. 몸만 버리게. 조용히 잊어주면 좋겠는데...가만있을 거 같진 않아서 말야. 그게 좀 걱정이 되네."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린다. " 왜 웃어." 기분이 나빠져 불퉁하게 물었다. 남은 진지한데 뭐가 웃기는 거냐. " 참...너도 웃기는 놈이다." "...............무슨 소리야." "............그 '문'이라는 거. 없지 않을까. 거짓말은 아닐까. 아니 아예 날 헤치려는 건 아닐까. 어디다 버려 두고 가는 건 아닐까........... 뭐...이런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턱대고 라일만 걱정하다니...확실히 그에 대한 감정은 살아 있군. " "........................." "........정말 못 봐주겠어." 아니꼽다는 듯이 한껏 비꼬더니 그가 병 체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 ........너 룬이 아니라며, 근데 무슨 헤어진 연인처럼 그리워하는 꼴이라니.. 넌 그럴 자격도 없어. 알아? 그를 버리고 온 주제에 걱정 같은 거 하지 말란 말이다." "..................무슨 상관이야." " 하. 상관? 당연히 상관있지! 라일의 반려는 이제 내가 될 꺼다. 평생 그의 옆에 있을 사람은 나란 말이다...너 따위에게 버려졌다는 건 용납할 수 없지만..뭐 나름대로 감사하고는 있어. 그러니 버렸으면 깨끗하게 잊어. 내 연인을 두고 걱정 되느니, 마느니 그런 소리는 정말 불쾌하니깐."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사칼과 그가 뒤엉킨 장면이 되살아나선, 냉막한 얼굴로 사칼을 안던 그와는 달리 쾌락으로 물들어 정성스레 사칼을 안는 모습으로 바뀌어,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행위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얼굴이 한없이 구겨진다.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맛이 굉장히 썼다. 젠장. 다정하게 사칼을 안아드는 라일이라니.....괜히 상상했다. 가슴이 따끔거려 애꿎은 술만 퍼마셨다. 그에 맞춰 말없이 술을 따라주는 사칼을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 .....행복하게 해줘." 꽤나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행복하게 해주라니....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행복하게 해줘라. 정말. 나 같은 거 잊고 어릴 때 형제같이 지냈다던 네가 가족같이 품어줘라. 쳇....완전히 근친상간이구만. 더 이상 사칼과 마주 볼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순간 휘청하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그렇게 많이 마셨나..... 의아한 마음에 어느새 일어서 버린 사칼을 앉은 체로 올려다봤다. "........................너 같은 거 잊게 해주겠어." "........................" "........너 같은 거 생각도 안 나게 사랑할거다. 알겠어?" "...........................너......술에.....뭘.." 퍼뜩 드는 생각에 위험신호가 잡혔다. 술에..뭐 탔냐.? 너. " 하.!! 행복하게 해주라고? 물론!! 너보다 백만배는 행복하게 할거다. 두고 보라고. " ".......너...너......." ".....참. 두고보진 못하겠군." "........너...그...게 무슨.." " 아아...안타까워라... 보란듯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아쉬워. 혹...죽음의 강을 건너다 실패하면 모를까." 비웃는 그의 웃음 사이로 희뿌연 안개가 끼듯 눈앞이 흐려왔다. 날....죽이려는 거냐. 결국엔?.... " 쉬....그냥...눈을 감고 편히 쉬는 게 좋아. 네 술잔에 발려진 약초는 꽤나 독한거거든? 괜히 안간힘 써봤자 소용없어. 그냥 푹..쉰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 그가 내 눈을 손으로 덮어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리고는 가슴까지 토닥여 준다. 남이 보면 잠을 재우는 것 같은 모션이었다. 어이가 없어 한껏 비웃을 요량으로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라 똑 쏘는 한마디를 유언처럼 남기고 싶었는데 혀가 굳어진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사칼. 너도 여기까지군. 내가 그렇게 두려운거냐. 죽일 수밖에 없을 만큼?? 나를 멀리 보내봤자, 안심이 안되겠지. 예상했어야 했어. 사칼이 가진... 그에 대한 사랑과 그에게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뿌리깊은 고목이었는지... 점점 사라져 가는 의식사이로 내 방만한 정신을 탓했다. 탓해봤자 이미 늦었지만. 그리고 머리가 아주 무거워져 눈이 저절로 감기며, 마지막 한 자락의 의식을 놓을 무렵. " ......이렇게...그를........얻는다 해도...난...절망 뿐이야.......알고 있나.?" 무심코 들린 그의 아픈 소리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너도 그도..아플뿐이야. 사랑이 인력으로 된다면 누가 절망하고 힘들어하겠어. 너도 참...딱한 인생이다. 그리고는 바로 의식이 끊겼다. '원이야..원아......' ....귀찮아. '...일어나 봐, 원아.' 귓가를 간질이는 속삭임에 느릿하게 도리질을 쳤다. 귀찮다고. 좀 자게 내버려둬. '그래도 일어나 봐.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냐.' " .......잔소..리쟁..이.." 잠결에도 큭큭 거리며 웃었다. 중학교 때까지인가... 항상 학교 가기 전 날 깨워주던 형의 목소리였다. 야행성인데다 워낙 게으른 동생 깨우느라 고생 좀 했지. 즐거운 웃음이 흘렀다. 때려서라도 깨우면 될 것을 완전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히려 잠을 부추겼다. 아니....그 목소리가 좋아서.....마냥 듣고 싶어서...더 자는 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뭐가...그렇게 즐거워.?" 즐거운 추억 사이로 벼락같이 다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이 와중에도 태평하군." 그 목소리의 영향인지 천천히 수마에서 빠져나왔다. 정신이 조금씩 들면서 처음 자각한 건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과, 온몸을 막대기로 두드려 놓은 양 지독히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며.....거센 바람 때문에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치우려는 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든 게 한박자 씩 늦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몸도 정신도 뭔가 이상하다. ".....아아... 좀 불편할 거야. 그래도 꽤 잘 자던걸?" 역시...내 앞에 선 사람은 사칼이었다. 멀찍이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혀가 마비되는 바람에 못해준 말을 내뱉었다. ".......겁....쟁이." 구겨지는 얼굴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여러 말보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일테지. 사실이니깐. 겁먹어서 날 없애려던 주제에...이제 와서 폼 내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고. 사칼을 무시하고 주위를 살펴보다 몸이 왜 이렇게 아픈지 알아냈다. 온 몸이 밧줄로 칭칭 동여매져 절벽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딱 한 줄로 연결된 체 아주 위태롭게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온 몸을 묶은 밧줄이 내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사정없이 조이는 바람에 군데 군데 피멍이 맺혀 있었고, 끔찍이 아팠다. 더구나. 아래를 본 순간. 젠장. 차라리 독을 먹이던가!! ...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여기가 바로 쿠란드 부족 경계선에 있는 하스티의 절벽이다." 뭐? 여기가? 발 밑으론 까마득한 절벽으로 아무리 유심히 봐도 지평선이라곤 보이지 않는 깊은 계곡이었다. 절벽근처라 이렇게 바람이 거센가.. 눈을 뜨고 있기가 무척 힘들었다. " ...........주술사 영감 말대로 이곳이 문이다. 이건 거짓말 아냐." " 그럼....뭐가 거짓인데?" 꽁꽁 묶인 밧줄에 가슴이 뻐근했다. 거기에 살을 에이는 바람은 입술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솔직히 사칼과 입시름하기도 벅차다. " 널 문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 납치였다는 거. 넌 몰래 떠났다고 생각하겠지만 라일은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거." " 무슨 소리야!!!!!" 놀라서 소리쳤다. 라일이? 라일이 왜 여길 와!! ".....네 붉은 천에...... 쿠란드 부족이 납치했다고 편지를 써뒀지. 아마 지금쯤 거의 다 왔을거다." "..........그를 배신하는 거야?!! 그런 거야!? 쿠란드 부족에게 붙은 거냐고!!!!" " 닥쳐." 싸늘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얼굴이었다. 식은땀이 흐르는지 머리카락이 축축 쳐져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다리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 모습에 의아해져 입을 다물고 말았다. " 함부로 말하지 마." "........................." " 그런 말...들으려고 그 역겨운 자식한테 몸을 판 건 아니니깐." 뭐? " 왜? 더러워? 그래도 상관없어." " 무슨.....소리..야.. 너...너..왜 그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문득 불안감이 스쳐지나갔다. 단순히...단순히 날..제거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분명했다. " ........넌...룬이 아니라고 했지만....넌... 확실히 룬이었어. 네 말대로.....미친척하고 네가 다른 세계 놈이라는 거..믿어버리고 그냥 쫓아버리려고 했지만...반려의 의식 때 알고 말았지...넌 룬이었어. 그냥.... 정신만 이상해진.....여전히 라일이 사랑하는 룬이었다고!! 알아?" 마치 울부지는 듯한 그의 거친 말투에 정신이 멍해졌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 ...모르겠어? 하하.. 너...어쩌다 미쳐버린거냐.. 참..이상도 하지. 라일이 끔찍하게 위하면서 곱게 모셔났는데..."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지 털썩 주저앉는다. " .........반려의 의식이...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건. 네가. 룬이라는 증거다." " .....뭐?" " 장로들이 아무런 저항을 못 받았다는 건. 네가 룬의 영혼이라는 거지. 네 말대로 겉모습만 룬이라고 한다면 ......의식이 성립될 수 없었어. 넌. 룬이야." 말도 안돼.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난 돌아가야 해. 사칼? 나...난 돌아가야 된다고 !!" " ....아마...라일도 알고 있을 거다. 딴 소리만 해대는 네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한 것일 뿐. 그도 네가 룬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아아...절망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난 역시 룬의 모습으로 그에게 남겨진 모양이었다. 더구나...그 룬이 납치되었다니, 그는..목숨을 걸고 구하러 올 작정인 거다! " ........아..아무리 그래도.. 너..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일이 여기 오면 위험하잖아! 부족끼리 앙숙이라며! 도대체 그는 왜 끌어들여! 나만 보내면 되잖아. 네 뜻대로 비겁하게 없애버리면 되는 거잖아!!!!!" 내 말에 그가 한참을 멍한 눈으로 가만히 침묵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만 아연해져서 그의 눈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쿠..란드 부족장과 거래를 했지. 라쿤 부족을 줄테니...라일은 나한테 달라고." "..............!!!!!!!!!!" 리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평화로운 모습도 순식간에 떠올랐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부족을 팔아먹는거야! 네 사랑이 뭔데. 네 사랑 따위가 뭔데!! 애꿎은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팔아넘기는 거냐고!! 악에 바쳐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너 따위 하나도 안 불쌍해. 미친자식. 한심한 자식!!! " ....나도 알아. 단단히 미쳤지. 사랑 때문에 가족을 팔아먹는 거나 다름없으니...하하...미친거지..아무렴. 하지만. 하지만 이젠 늦었어. 라쿤은 쿠란드에 부속될 거고. 난 라일과 떠날거다. 괜히 그 변태놈에게 몸을 판 게 아니지. 라일...라일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했다. 팔이나...다리..하나쯤으로 맺힌 원한을 풀고 나면 목숨은 살려준다고 했어. ." ".........................무.....섭다....너.....너...정말...무섭고 독한 놈이야..." " 알아. 그러니 20년을 한 사람만 바라봤지. 독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지. 안 그래?" 입술을 간신히 끌어올려 웃는 그가....금방이라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멀리서 시끄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잘 보이진 않지만...난 직감적으로 라일이 온거라 생각했다. 사칼도 느꼈는지 그 쪽에 잠시 시선을 두더니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선다. 그리곤 이내 나를 돌아보며 제법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자.....이제 결론이군. 굉장히 설레는데?" 뒤돌아 가려는 그를 서둘러 붙잡았다. " 난!!! 난...어떻게 되는 거지?" 이렇게 매달아놓고 나보고 뭘 하라고!! 라일이 팔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끊어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경악에 차서 절박하게 물었다.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아. 내 말에 그가 잠시 시선을 주더니..냉정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 ......라일이 너를 발견한 순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네 밧줄을 끊을 거다.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절벽으로 떨어지는 너를 보며 그가 절망하도록. 최대한..가까이에서 네 마지막을 지켜보게 할거야. 굉장히 괴로워하겠지? .....널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사랑을 잃은 절망감에...미치기라도 한다면 더 환영이야. 아까 말한데로 불구까지 되면 더할 나위 없지. 그래야 내 사랑 앞에서...저항하지 못할 테니깐..." 그는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 마냥, 말도 안 되는 광기에 사로잡혀 말을 이었다. 여전히 뒤돌아 선체 말을 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다. " .......제..발...그러지 마.. 사칼. 그를 사랑한다면...그렇게 하면 안돼..." 시끄러운 소리가 더욱 가까이서 들려왔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묻혀 나오는 걸 보면 격렬한 싸움이 일어난 듯 했다. 마..막아야 하는 데...마음이 조급해졌다. " 왜 안돼!!!? 왜!!? 난!! 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어!!!! 그를 얻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더 이상은...더 이상은!!!! 못 참아. 그를 망가뜨려서라도 갖겠어!" 그가 사납게 뒤돌아 서서 미친 듯이 외쳤다. 그러는 그의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고,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래......네 얼굴이 말해주고 있다고..이 바보같은 놈아... 사칼의 얼굴은 눈물 범벅에 처참한 형색이었다. " ......다...다...틀렸어. 이젠 늦었어." 그가 거칠게 눈물을 훔치더니 뒤돌아 섰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갑자기 멈춰서선 시선만 뒤로 돌린 체, -하스티의 절벽. 그 곳에서 뛰어내려라- "........................." " ...그게 문을 통과하는 방법이라 했다. 믿진 않아....... 넌 죽을 거야.." 하곤 점점 걸음을 빨리 해 저 멀리 사라져갔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발 밑의 낭떠러지를 내려다 봤다. 끝도 없이 깊숙이 뻗은 그 절경에 감탄은커녕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오직 두려움뿐. 이젠...정말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라일에게 남길 상처..그런 것들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뭐가 문이라는 거냐. 노망난 영감 같으니.. 여기서 떨어지면 죽기밖에 더하냐고. 허탈한 한숨이 흘렀다. 역시 문은 없었고, 문이 없어도 떠나면 된다는 2차 선택도 박탈당했다. 꼼짝없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야말로...정말 끝이었다. 그렇게 낙담하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금발의 아름다운 머릿결이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울컥 올라오는 속상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오른쪽 머리카락은 뭉텅 잘려나가 귓가에서 찰랑이고 있었고, 붉은 피가 마치 점박이처럼 그의 금발에 엉켜있었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움직임도 둔했다. 그래도 정신 없이 검을 휘두르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란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달려드는 적의 가슴이며 배에 검을 찔러 넣고 미쳐 빼지 못한 검을 대신해 방패를 휘둘러 쓰러트리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너무 많았다. 그에게 달려드는 적들은 너무 많았고, 위험했다. 앞뒤 옆 할 것 없이 검을 휘두르고, 거의 초인의 가까운 신경으로 돌아보지 않아도 뒷 쪽의 적을 막아서는 모습은 가히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정말 지쳐 있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사칼을 찾았다. 어디있어. 너. 좀 말려보란 말이다. 몸을 팔았다면 끝까지 붙어서 몸은 성하게 거래를 하던가. 병신 같은 놈. 마구 욕이 솟구치며 화가 났다. 마침내 닿은 시선 끝에 사칼의 모습이 들어섰다. 그는... 곧은 자세로 라일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 그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갈색머리의 거인같은 놈이 보였는데, 그 놈이 쿠란드의 부족장인 것 같았다. 냉막한 시선으로 라일만 바라보는 사칼의 모습에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다 뒤에 있는 부족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선이 굵은 얼굴에 비열하게 생긴 그 놈은.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어 웃으며 라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이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벼락같이 자각한 생각에 미친 듯이 도리질을 쳤다. 아...안돼. 놈은 라일을 죽일 생각이었다. 경악에 찬 내 모습에 즐겁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던 놈이..보란듯이 사칼의 목에 얼굴을 묻고 더러운 혀로 쓱 핥아 올리는 데도 사칼은 라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난 정말 괴로워졌다. ......바보같은 놈아....결..국.. 죽이게 될 거야. 무슨 일을..이딴 식으로 벌여놨냐. 한숨처럼 원망과 아픔이 토해졌다. 내 사랑과 그의 사랑이 한꺼번에 몰아쳐 아픔도 두 배로 내 가슴을 쳤다. 시선을 돌려 라일을 바라봤다. 막 적의 팔을 잘라내면서 분수처럼 쏟아진 피를 흠뻑 맞고선, 지친 몸을 이끌고 힘겨운 싸움을 해가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말을 해야 할텐데...가슴도 목도 꽉 막혀서 힘겨운 숨만 간신히 들이쉬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도끼를 든 남자가 라일의 머리를 내리치려 한다. 헉. 숨을 들이키며 소리치려는데. " .....안돼!!!!!! 라일!!!!" 그의 외침에 번개같이 돌아 방패로 도끼든 남자를 통째로 밀어 쓰러트렸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방패가 나가떨어지자, 이로써 그의 유일한 방어수단이 사라졌다. 사칼이 그 남자에 잡힌 체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 뭐야!! 당신. 라일은 살려준다고 했잖아!! 부족만 넘겨주면. 여기로 유인만 해주면 살려준다고 했잖아!!! 아악.!!! 피해!! 라일!!!!!!"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를 잡고 있는 비열한 그 놈은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체 꼼짝도 않고 있었다. 사칼의 말에 라일이 동작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사칼을 돌아본다. 뭔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느낄 배신감과 절망, 슬픔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라..일. 정신..차려. 도망가야돼. 멍하니..있을 틈이 없다고." 주변에 적들에게 둘러 쌓인 체 움직임을 멈춘 그가 안타까워 흐느끼듯 말했다. 꽉 막힌 목소리가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작게 울렸다. 아.아. 목을 가다듬었다. 기침도 하면서 목을 틔웠다. 말을 해야 돼. 내 말을 듣게 해야 돼. ".....네가...결국엔.." 거친 호흡 사이로 그의 억눌린 말투가 들려왔다. 그의 말에 사칼이 회초리라듯 맞은 듯 몸서리를 쳐댔다. " 도망가!!! 어서!! 아아.. 라일!! 빨리 도망가!!!!!" 사칼의 울부짖는 목소리에 넋이 나간 듯 굳어버린 그를 적들이 가만 나둘 리 없다. 라일의 왼쪽에서 시퍼런 칼날이 파고들었다. " ....조심해!!!!!!"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 목소리란 걸 자각하기까진 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찢어질 듯 절박한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내 목소리에 그가 뒤늦게 몸을 움직여 피하긴 했지만 스쳤는지 그의 옆구리가 젖어 들어갔다. 서서히 흰색의 옷에 붉은 기운이 번져간다. 헤어진 날 봤던 사제복 그대로였다. 그는... 신전에서 돌아온 즉시 그 상태 그대로 험난한 길을 쉬지 않고 온 것이었다. 기도하는 게 무척 힘들다는 그의 투정이 귓가에 선명한데....그런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힘겹게 다가오는 무리들의 칼을 쳐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리곤 문득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절박한 심정을 읽은 건 나뿐이었다. -제발..도망가...- 난 입 모양으로만 간신히 말을 전했다. 제발 도망가. 그냥 가. 제발. 가라고 가버리라고 그 말만 쉴새없이 계속 전했다. 그런 나를 미동도 없이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는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웃지마. 웃지 말라고. 병신같이 그게 뭐야. 제발 가. 지금이라도 도망쳐. 펑펑 솟아나는 눈물로 애원했다.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면서 통곡했다. -....괜찮아.....- -.................- -...........울지마. 원아..- 어이없게 웃음이 흘렀다. 룬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끝까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는 그의 고지식함이 서글퍼 더 눈물이 흘렀다. 잠깐 방심한 사이 치고 들어오는 적의 칼을 힘겹게 쳐내고 그가 계속 입술을 달싹였다. -.....걱정마. 우린 다시 만나.- -...............................- -....우린...만나게 돼있어. 그러니깐 슬퍼하지도...아파하지도...마..- -............................- - 어디 있든. 반드시 찾아갈 테니깐...- -........................- -......그럴 테니깐....- 그 순간 휙! 하고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그의 허벅다리에 박혔다. " 윽." 그 반동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만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갈 정도로 아팠다. 잇사이로 신음을 흘리는 그보다 내가 더 아팠다. 미친 듯이 울부짓는 사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멀어졌다. 그가 무릎을 꿇은 다리를 힘겹게 일으키며 내리쳐지는 검을 받아낸다. 힘에 겨운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워 발버둥쳤다. 그러던 중 투둑 소리와 함께 몸이 한차례 가라앉았다. 놀라서 위를 쳐다보니, 잘 꼬아져 있던 밧줄이 실낱같이 흩날리며 끊어지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라일을 눈으로 쫓았다. 아아......차..라..리 보지 말 것을... 휙 하고 다시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멀어지고, 그의 모습만 클로즈업 돼, 모든 게 정지된 화면같이 내 눈에 박혀 들어왔다. 숨을 한차례 들이키곤 멈췄다. ......내쉴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휙. 두 번째 화살이 그의 배에 꽂혔다. 안돼..안돼. 홍수처럼 흐르는 눈물 때문에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리질을 치면서 제발......누구에게 부탁하는 지 모를 말만 되뇌이며 빌고 있었다. 그는 화살이 박힌 자신의 배를 한차례 내려다보곤, 고개를 들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 그의 젖은 눈이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간절하게 내게 고백하는 그의 사랑이 절절하게 가슴에 번져갔다. 화살을 세 개나 맞고도 그는 마지막 안감힘으로 힘겹게 적의 검을 막아서고 있었다.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다시 투두둑. 몸이 다시 한번 덜컥하고 흔들렸다. 위를 보니, 얇은 날실이 힘겨운 듯 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대 자연의 품이라........멋지긴 하지만, 꽤 아프겠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 라일." 조용히 불러봤다. 그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불렀지만, 솔직히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들은 듯 시선을 마주쳐왔다. 한동안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는 피로 물든 붉은 옷에,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핏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도..이미 마지막에 가까워진 듯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이 반쯤 감긴 눈으로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 ................내가.....사랑하는 거 ..알고 있죠.?" 울먹이듯 번지는 내 말에 입 모양을 읽었는지 그가 감기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이제야 해주다니..한심함에 내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 사랑해요............ 정말 사랑했고......... 언제든...... 어디서든.....사랑할거예요..... ....... 사랑할거니깐................... ...................................반드시 와줘요." 최대한 입 모양을 크게 해서 또박 또박 말했다. 천천히...말하면서 그가 내 마음을 알아챌 수 있도록 바랬다. " 그럴...수 있죠?" 내 말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천천히 끄덕이는 그의 몸짓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찾아오겠다는 그의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감이 번져갔다. 저쪽에서 실신한 듯 보이는 사칼을 눕히고 걸어오는 쿠란드의 부족장이 보였다. 커다란 검을 들고, 라일에게 걸어가는 놈을 보며...그가 할 다음행동이 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이제...나도 곧 이었다. 곧....밧줄이 끊어질 것이다. 놈이 무릎을 꿇은 체 탈진한 라일에게 다가가선, 그의 목에 칼을 겨눴다. 뭐라뭐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참수하리라.. 그 끔찍함에 소름이 돋고 두려웠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보리라 생각했다. 라일과 따뜻하게 얽힌 시선을 옭아 맨 체로 그를 안식에 잠기게 하리라 결심했다. 놈의 칼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사랑해.....원아....- 그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빙그레 웃는다. 나도 웃었다. 울면서도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의 목에 칼이 떨어진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도 깊은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끝없이 끝없이 떨어지는 몸을 느끼며 거센 바람과 속도의 압력에 못 이겨..서서히 멀어져 가는 의식사이로. 그의 사랑스런 눈빛이 떠올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자.... 이 불빛에 따라 눈동자를 움직여 보세요." 왼쪽으로 가는 불빛에 눈동자를 움직였다. 불빛이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가길래 무심코 따라 움직였다. " 아주. 잘했어요...그럼..천천히 눈을 깜빡거려 볼래요?" 정신은 몽롱했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맞춰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힘겹게 두 세 번 눈을 깜빡이고 나니, 희미한 약 냄새를 풍기는 기척이 가까이 다가온다. " .....거의 일주일 만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세요?" 고개를 끄덕였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듯,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꺼풀을 벌리며 불빛을 들이댄다. " ...정신을 집중해 보세요. 눈동자에 힘을 주고, 저를 보십시오. 그래요. 잘하고 있어요. 이젠 시야가 또렷이 보이죠? 제가 보이나요?" 희미한 잔상들이 하나로 겹쳐지더니, 산만하게 퍼진 시야가 한 곳으로 몰렸다. 눈을 깜빡여 뻑뻑함을 없애곤 다시 집중해서 앞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의사 특유의 스마트한 눈동자와 단정한 얼굴이 한 가득 박혀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 몽환적인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 자...됐어요. 이름이 뭐죠?" ".....저..정원..이.."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요?" 물론 기억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 다행이군요. 별다른 외상은 없는데 깨어나지 않아서 정밀 검사를 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달리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여긴...병원이고 당신은 의사인가? 이걸 먼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바보 같은 질문이라 입을 서둘러 다물었다. 좀.....어리둥절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뭔가....긴박하고 간절한 것이 생각날 듯 말 듯 해 쿵쿵 가슴이 떨려 왔다. 아직까지 멍청한 머리가 제 기능을 못하는 듯 해 못내 답답하다. 몸을 움직여 보려 해도 바닥으로 가라앉을 듯 축축 늘어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쾅!! 하고 엄청난 굉음으로 문이 열리고는 장신의 남자가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는 홀쭉한 얼굴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일그러트리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 이.......이.....이 바보같은 놈!!!!!!" 비명처럼 내지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달려들어 의사를 밀쳐내고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사정없이 흔들며 소리쳐댔다. " 병신새꺄!! 내가 !!!! 내가!! 말했지! 택시 타고 가라고!!! 그러면 이런 사고는 안 당했을 거 아냐!!! 어? 내 말 좀 들으면 어디가 덧 나!!?! 내 말 듣는 게 죽기보다 싫어?!!!! 어?!!!! 설마.!!! 설마.. 일부러 뛰어든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지!!!!! 정원이!!!!!!!"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한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그가 소리치는 말은 들리지도 않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입술을 달싹였다. 어느새 줄줄 흐르고 있는 그의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처럼 불러봤다. " ......................형...이었어?" 내 말에 그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내 얼굴을 감싸쥔다. " 그래....형이야.....원이야.......원아...." 흐느끼는 중간중간 신음같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난 소름이 돋았다. ".....혀.....형......형이었어? ......형 이였던 거야?!!! " 경악에 차서 부르짖는 내 목소리에 그가 의아한 듯 울상을 짓는다. "....왜..왜 ...그래 ...원아.. 형 못 알아봐? 어? 나...나 기억 못해.??" 내 얼굴이며 목이며 팔을 정신 없이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떨려왔다. 하...하..하.... 허리를 접고 웃어댔다.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점점 흐느끼는 소리로 변해가고, 불안해하는 형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 .....이현..형.... 형...." 당신을 잊은 게 아니라고....그만 불안해하라는 의미에서 형의 이름을 간신히 불러주곤... 힘껏 부둥켜안고 목놓아 울었다. 다시는 그렇게 울 수 없을 만큼 흐엉흐엉 소리를 내며 어린애처럼 울어버렸다. 목이 쉬도록, 눈가가 따갑도록, 가슴이 뻐개지도록 마냥 울어댔다. 영문을 모르는 그도 같이 우는 바람에 순식간에 이 작은 병실은 두 사내놈 때문에 눈물바다가 돼버렸다. 그의 품에서 울면서 웃었다. 난. 왜....미쳐 알아채지 못했을까. 기이한 데자부와 환각처럼 겹쳐지는 둘의 모습이. 이렇게나 똑같다는 걸 왜 .....왜 몰랐을까. 그는 라일이었다. ..............하나의 사랑. 사랑의 언약으로 묶인 내 영혼의 반려는 바로 나의 형이었다. " 누워 있어.. 죽 만들어 올게." 침대 위에 누우며 희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 입맛 없어도 먹어야 돼. 그래야 기운이 좀 나지..." 내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음....나가지 말라고 고개를 흔든 건데 먹기 싫다는 의미로 이해했나 보다. 한동안 쓰다듬던 손이 얼굴을 어루만지고도 한참을 옆에서 떠날 생각을 못하더니, 천천히 일어서 방을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눈을 떴다. 깨어난 날, 퇴원하고 싶다는 내 말은 무시당한 체 2~3일을 더 입원해 있었다. 형은...간단한 검사로 별다른 증상이 없다고 골백번은 설명한 의사가 제발 퇴원해도 된다고 진저리 칠 정도로 유별나게 굴었다. 형의 단호한 의지대로 정밀 검사까지 해보고 나서야 오늘 퇴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날.. 그렇게 모든 슬픔을 털어 내듯 울어버린 날. 울다 지쳐서 형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일어난 순간. 난......내 죄악으로 일그러진 내 사랑을 되찾았다. -......최악..의 순간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루가 1년 같이 길고 느리고..... 돌아버릴 정도로 괴로운 시간이었어. 혹시라도......잘못되면.. 그럴 리 없을 거라고 미친 듯이 부정해도... 절망에 빠진 순간부터는.....그때부턴...완전히 지옥이었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널 보냈을까,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시킬걸. 아니 차라리 내가 갈껄......그 생각부터, 차라리 너 알바 같은 거 안 시킬걸. 아니...차라리 그렇게 아파하는 널 내버려둘걸. 차라리 그 주문진 자취방에 발도 디디지 말걸. 차라리.....차라리......널...나 같은 거랑 엮이게 하지 말걸.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울먹이고...- 날 꼭 끌어안고 지난 며칠 간이 얼마나 못 견디고 괴로운 시간이었는지 실성한 사람처럼 내뱉는 그를 그냥..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턴 정말 네가 하자는 대로 다할게. 형 동생 관계도 벅차다면 하지 말고, 내 더러운 욕망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참을 수 있어. 아니...그냥 옆에만 있어주면 아무것도 바랄게 없다 원아... 가만히...내 옆에만 있어준다면...그래만 준다면...- 다시 흐느끼는 형의 지친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아니지? .......자진해서 뛰어든 건 아니지? 나....나 무엇보다도 그게 무섭고 두려웠어. 그냥...단순한 사고가 아니라...정말 나를 떠나려고....니가 그렇게 힘들어하던 세상을 등지려고....그런 거라면 정말....그런 거라면 더 이상 난.....살아 갈 수가 없어...원아...- 그의 어처구니없는 착각이 못내 서글펐다. 내가 당신을 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그를 더욱 끌어안으며 절대 아니라고...그런 생각..꿈에도 한 적 없다고 몇 십번을 되풀이 했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데 형이 쟁반을 들고 방을 들어선다. " .....잠은 안 오지? 속이 허해서 그래." 꼭 먹여야겠다는 사명감이라도 있는지 말끝마다 내 공복감에 불을 지피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작은 노력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침대 옆 콘솔에 쟁반을 내려놓고,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몸을 반쯤 일으켜 준다. 등엔 베개를 받쳐 편안히 기댈 수 있도록 하곤, 자신도 맞은 편 침대 위에 앉아서 죽을 한 수저 떠서 내민다. 솔직히....내 상태를 말하자면...절대 이런 조치들은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몸은 뛰어다닐 정돈 아니지만 걸어서 산책할 정도는 되었고, 머리도 상쾌하고 컨디션도 나름대로 최상이었다. 고로 침대 위에서 혼자 못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방에서 나가 식탁에서 식사를 해도 되는 거였고, 무엇보다. 이렇게 수저로 떠 먹이는 수고는 더더군다나 사양할 처지인 것이다. 하지만...아무리 괜찮다고 골백번을 말해도 전달이 안되니 문제였다. 체념하고 먹여주는 대로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기계적으로 죽을 먹으면서 가까이 앉은 형의 얼굴을 살폈다. 나보다도 환자 같았다. 반쪽이 된 얼굴에 충혈 된 눈. 퍼석한 머리카락하며 하얗게 말라터진 입술의 딱지들이 그의 수려한 얼굴에 아픔그림자를 남겼다. 문득 다가오는 수저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왜? 먹기 싫어? .....이거 다 먹어야 돼. 입벌려." ".........................." ".........원이야.. 기운 차려야지. 이것만 먹자. 어서.." 안타까운 듯이 자꾸 재촉하는 형의 얼굴에서 라일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때도 이렇게...먹여준 적이 있었는데....물론 정말 역겨운 음식이라 엄청 거부했지만... 빙그레..웃음이 터졌다. " ...형. 나 정말 괜찮아. 이리 줘. 내가 먹을게." 그에게서 그릇을 뺏어 들어 엄청난 속도로 입에 퍼담았다. 그런 모습에 형이 기겁하며 말렸지만 이까짓 거 못 먹어 줄까 싶어 빠르게 먹어치웠다. " 됐지? 죽 먹었으니깐 이제 뭐할까. 형이 하라는 데로 할게. 또 뭐해?" 내 말에 그는 잠시 바라보더니 빈 그릇을 들고 나가려 한다. 옆에 있었으면 해서 서둘러 옷깃을 잡아챘다. " 어디가? 여기 있어 줘." 형이 필요해~ 나 아야 하잖아~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부비적 대며 칭얼거렸다. " 원이야..." 형이 돌아선 체 내 이름을 부른다. 여전히 그의 허리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내가 ...왜? 라고 반문했을 때, 괴로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난...난....네 형이야.." "....................." ".............네.....주인이 아니라고." 잔뜩 회한이 묻은 그 내용에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 뭐?" "......시키는 데로 한다는 네 태도. 무슨 주종관계처럼 그러면....나...굉장히 상처받는다.." "................형...." ".....싫다는 널...억지로 데리고 온 나한테...책임이 있겠지만...하지만..그렇다고 내 감정을 무시하고, 상처 입히는 네 행동은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이 아파. 알아?" 아니....그러려고 그런건 아닌데..... 잔뜩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드는 생각이..... 뭐가 아니라는 거냐. 죽은 듯이 그의 인형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했잖아. 그의 사랑을 받지도 말고 사랑 같은 거 줄 수도 없다고 다짐한 건 너잖아... 그렇게 잔뜩 비꼬는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은...다 알고 있었나보다.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다 알고 있으면서 혼자 괴로워하고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들고 있는 쟁반을 내려놓고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며 마주섰다. "..................그래...많이 아팠어?" "............................" "........하지만......그게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잖아..잊은 거야?" 내 말에 그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 ....내 생모를 저주하고, 나를 사랑하게 된 걸 후회하고 절망했으면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죽은 엄마나, 아빠의 배신이 떠올라 괴로워했으면서....그러면서도...사랑하는 자신의 집착이 무서워서....스스로를 원망했으면서......" 그의 입매가 단단히 굳어갔다. 아픔인지 슬픔인지 모를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 " 그러면서......어떻게...우리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도망치려 하고 형은 어떻게든 잡으려 하는 관계가...어떻게 정상적인 사랑이 될 수 있겠어." 그러자 그가 내가 잡은 손을 거칠게 떨쳐내더니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외쳤다. " 그래도!!! 그래도 사랑이야. 알아? 그래도 !!! 난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고 우리가 하는 건!!! 사랑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어. 괴롭고 힘들어 도망치는 너와는 달라. 난!! 나....난.. 끝까지 짊어지고 갈 거다.!! 이런 아픔 따윈... 가슴을 좀 먹는 상처 따윈!! 몸에 지니고 있어도 난 끄떡없어!! 왜!!! 난 강하니깐!!! 알겠어? 난 강해. 그래서 널 지키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도망만 다니는 너와는 달리!!! 난 부딪혀 피가 터져도 사랑할거다!!!!!" 형형한 눈빛을 쏘며 금방이라도 피가 터질 정도로 핏줄을 세우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남자를 눈에 한가득 담았다. 다가가 입술만 살짝 맞대고 떨어졌다. 뭔가 더 말하려던 남자가 갑작스런 내 행동에 멈춰 섰다. 두 손을 들어 남자의 양 뺨을 감싸쥐었다. 키가 꽤 큰 관계로 까치발을 들어 간신히 취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고개를 조금 숙여서 이마에 인사 같은 입맞춤을 한 후 그의 입술로 내려와 정성 들여....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듯. 그의 아픔을 다독이는 다정한 키스를 해줬다. 같이 혀를 얽을 생각도 못하는 그의 혀를 빨아올리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나왔다. 미동도 없이 굳어 있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난 오래된 내 상처를 끄집어냈다. " .....우리 엄마.....용서해 줘...형." "............................" "........내가...대신 평생 사죄하고 살 테니깐....내 생모...용서해주자..이제." 눈에 띄게 동요하는 그가 보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그의 목울대가 심하게 움직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사랑하는데.....이렇게 사랑하는데...그게 오히려 고통이면 사는 게 아니잖아.. 힘들겠지만 노력해봐, 내가 평생 함께 할거니깐.. 평생 사랑할 테니깐.. 그걸 담보로 나를 좀 먹는 우리 엄마 죄 좀...이제 그만 용서해 줘...제발." 참았던 눈물이 솟아 흘렀다. 평생 엄마라고 부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난 은연 중으로 그래도 내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누구보다도 독한 마음으로 저주한 나지만, 그녀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형을 온전히 사랑할 수도, 그에게서 온전히 사랑 받을 수도 없었다. 과거의 죄악의 산물이 남은 이상, 과거의 상처가 아직도 건재한 이상 우린 서로에게 아픔만 줄뿐이었다. "...........항상...사랑했어...알고 있었잖아..형..." 한숨처럼 퍼지는 내 고백에 그가 엄청난 악력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성급하게 입술을 마주쳐 오는 행동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고 열렬히 응했다.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내 영혼이...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면...이게 사랑이라고 한다면....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그를 마주 안았다. 격하게 몸을 섞으며 쾌락에 몸을 떨고 마치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열망으로 그와 하나가 됐다. 내 안에 몸을 묻은 그와 함께 오르가즘을 느끼며....다시 찾은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누구를 향한 감사인지 모르겠지만 어쨋거나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한차례 몸을 섞은 후. 작은 키스를 퍼붓던 그가. 작게. ....이미..용서했어.........너를 얻은걸로...용서하고도 남았어. 라고 말하는 덕분에 더 행복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기묘한 체험을 지금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라일이 형인지, 모습이 닮았어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고, 내가 어떻게 그곳으로 가게 되었는지, 도대체 그곳은 어떤 곳이며, 라일의 정체는 또 뭔지, 아주.. 이해불가능한 일들 뿐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상식이나 논리가 통하지 않았던 내 초월적인 경험에서 확실한 이유를 들이대는 건 좀 곤란한 일이긴 했다. 결국 대충 혼자 생각하고 결론짓는 게 속 편한 거지....하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냥.....아주아주 심심한 어떤 신이... 앞에 놓인 사랑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놈에게 장난을 좀 친 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의 영혼이 얼마나 간절히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데, 그딴 식으로 자꾸 삽질할거냐. 라고 일침을 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생인지...내 업인지... 어쩌면 우주나 물리적 공간을 초월한 영혼의 기억을 더듬어 본 걸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 계기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그거면 된 거라고 생각했다. " 무슨 생각해?" 그가 내 어깨를 감싸며 묻는다. 천장을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짧게 입술을 핥고 지나간다. 새삼...같이 누워 있다는 이 상황이 뭉클하고 감동으로 밀려왔다. " 그냥........당신 필명 말야." 음....왜 갑자기 이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재밌겠다 싶어 물었다. " 흠....당신?" " ......아, 어색해?" 의아해 하는 그를 두고 잠시 키득거렸다. " 이젠 형이라고 못 불러. 당신, 자기, 이현씨 등등으로 부를 꺼야." 내 말에 그가 몸을 재빨리 겹쳐왔다. " 그래? 그럼...나도 이젠 안 참아." ".............날 죽이려는 거야?" " 설마~ 몸으로 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사랑해주겠다는 데 거절하긴가?" 다시 예의 그 뻔뻔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서 한숨이 흘렀다. 내 가슴 이곳 저곳에 입술을 대며 지분대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를 한 대 때려 놓고 말을 이었다. " 아무튼 필명 말야." " ............그건 왜?" 유두를 세게 빨리는 바람에 신음이 흘렀다. " 장난치지 말고... 바꿔보는 게 어때? 너무 촌스러워."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칼럼을 쓰고 있는 그는 잡지에 꾸준히 연재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솔직하고 과격한데다 태클 받아도 마땅한 다소 위험성 있는 글을 쓰기 때문에 실명이 아닌 필명으로 쓰고 있는데, 센스 없게도 이니셜이었다. " 라일 어때? 아니면......아! 그래. 루스탄도 좋고!" " 뜬금없이... 그건 또 언제 생각한 거야? 그것도 촌스러워." 투덜대면서도 구체적인 이름까지 제시해주자 그가 얼굴을 들며 솔깃해 한다. 그렇게 필명에 대해 한참 실랑이를 해대다가 다시 살아나는 쾌락의 여운에 유쾌하게 웃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난...사칼이 내 생모와 같은 영혼이 아닌가 싶다. 좀 징그러운 생각이지만..;;; 나와 그를 떼어놓으려 애쓰던 그의 안쓰러운 영혼이 이젠 좀...쉬었으면 한다. 더 이상 가슴앓이 안하고 행복한 영혼으로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길 진심으로 빌었다. 나와 라일... 나와 형처럼... 진실한 영혼의 반려를 언젠가 만나게 되길 간절히 빌었다. fin